니체와 바그너
니체가 처음으로 바그너와 코지마를 만나게 되는 날은 24살 때인 1868년 11월로 바젤 대학 교수로 취임하기 3개월 전이다. 니체는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를 비롯한 독일의 현대철학과 오페라의 미래에 관해 의견을 나눈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니체와 바그너가 관심을 모은 것은 둘 다 반 기독교적 무신론적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니체는 기독교가 원죄의식을 사람들에게 주입시키면서 양심의 가책이라는 굴레를 만들어 씌웠다고 보았다. 이런 양심의 가책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방법으로도 벗어날 수 없다. 후에 니체가 바그너의 <파르지팔>을 파렴치한 작품이라고 여겼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둘 사이의 관계가 급속도로 발전하는 계기는 1872년에 출판된 『비극의 탄생』 때문이다. 니체는 이 책에서 바그너를 ‘독일의 희망’이며 ‘독일 문화의 센세이셔널한 전환점’으로 묘사해 바그너는 상당히 흡족해 했다. 그가 특히 가장 맘에 들어 하는 부분은 자신의 작품을 그리스 비극을 대신할 기념비적 예술이라고 언급한 부분 이였다. 니체는 바그너를 건강하고 원시적인 힘을 이용해 독일신화의 재탄생을 가능케 할 인물로 보았다. 특히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3막 1장을 독일 신화의 재탄생과 연관될 수 있는 예시로 들고 있다. 바그너가 『비극의 탄생』에 대해 열렬한 찬사를 보내자 니체는 바그너의 이념을 전파할 생각으로 1876년 축제를 준비하면서 교수직을 사임할 생각을 한다. 바그너는 니체를 자신의 홍보를 전략적으로 도와 줄 재능 있는 신봉자로 여겼다. 그러나 니체는 바그너가 요구하고 있는 이런 예속 관계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바그너가 보이는 제국주의적이고 반유대적 관점으로 인해 점점 마음이 떠나고 있었다. <파르지팔>의 기독교 찬양은 둘을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하고 니체로 하여금 바그너의 비판자로 돌아서게 만든다. 『바그너의 경우』에서 니체는 바그너를 퇴폐주의자란 뜻의 데카당스로 부른다. 그는 이를 “필연적으로 망가진 감수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감수성을 누구보다 높은 감수성이라 주장하고, 자기의 타락상을 하나의 법칙으로, 진보의 완성으로 간주하는 자들”로 묘사한다. 『니체 대 바그너』는 『바그너의 경우』에 대한 비판에 대한 주석의 형태로 작성된 글이다. 1888년 니체가 발작을 일으키기 전에 쓴 것으로 마지막 저서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니체는 자신을 삶의 충만으로 고통 받는 자로서 디오니소스 예술을 원하고 삶에 대한 비극적인 통찰과 전망을 원하는 자로 묘사한다. 바그너가 예술이라는 가상을 통해 삶으로부터 구제받기를 원한다면 니체는 고통스러울지라도 삶 그 자체를 긍정하며 그것의 영원회귀를 꿈꾼다. 결국 니체가 그리던 그리스의 비극의 정신은 바그너를 통해 구현되지 못한다. 바그너의 독일 정신은 제국주의적인 것으로 변하고 이는 삶의 위안을 얻지 못한 독일인들을 기만하는 상상력에 불과하다.
눈에비친햇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