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사상의 현대적 과제
유가사상의 회복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대한 一考
[한글 요약]
이 논문은 '유가사상이 오늘날 어떻게 유효할 수 있는가'에 관한 하나의 탐색이다. 이러한 연구주제를 선정하게 된 이유는 우선, 문명사적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서 혹은 한국사회의 도덕적 황폐에 대한 대안으로서 동양전통사상이 거론되는 시대적 배경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엄청나게 변화한 현대사회에서 단순히 유가적 가치의 회복을 주장하는 것으로는 현실의 사회적 모순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적 사회적 조건의 변화라는 현실에 조응하면서 유가사상의 문화이상을 실현할 방도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지적 탐색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유가사상이 어떻게 사회적 지배체계와 질서를 합리화할 수 있었는가, 당시의 사회적 모순과 유가사상은 어떤 연관이 있는가, 당시의 부정적 사회상에서 사상은 왜 치유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는가 등이다. 이러한 탐색은 사상과 정치사회적 지형이 만나는 접점에 주목하면서, 유가사상이 어떻게 정치사상을 장악하고 정권유지를 해 왔는가를 역사적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유가사상의 흐름 및 그 사회적 의미를 이해하고자 함이다. 이 작업을 통하여 유가사상이 정치체계와의 관련에서 어떠한 순기능과 역기능을 결과했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특히 사상이 정치사회적 연관에서 어떻게 왜곡, 굴절되는지 혹은 무력화되는지를 주목하였는데, 그것은 정치사회적 지형을 고려하지 않은 전통유가사상의 회복이라는 당위적 주장들로부터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실마리로 하여 깨뜨려야 할 구각에 대한 비판적 고찰 및 오늘날 유가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짊어져야 할 시대적 과제를 제시한다. 그것은 현재의 역사사회적 조건에 조응하는 유가사상의 새로운 해석체계의 정립이라는 과제이다.
I. 문제제기
서세동점의 근대사 이후, 보다 직접적으로는 정부수립 이후 정치 경제 체제의 전격적인 변화와 더불어 우리 사회는 급속히 변화의 양상을 보여왔다. 정치 경제 체제의 변화에 따라 사회구조가 전반적으로 변화되고 그리하여 사회문화적 변화 및 사회의식이 변화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변화의 양상이 긍정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의 현실은 '총체적 부패 공화국'이라는 부끄러운 사회이고, 그러한 오욕의 용어에 경악하기 보다는 그것을 세태로 치부하고 그 세태에 부응하는 삶을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심리가 만연해 있는 사회이다.
우리의 현실을 개량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흔히는 우리의 부정적 사회상의 원인을 대체로 물질적(경제적)으로는 근대화하였으나 의식의 측면에서는 근대화되지 못한 문화의 지체현상 때문으로 파악하면서 의식의 근대화를 촉구하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 세계의 학문적 경향은 '근대화'라는 개념에 내포된 긍정적 의미의 역사적 타당성을 의문시하면서 근대화에로의 강박관념을 극복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혼란스럽다. 우리는 급격한 사회변화 속에서 의식의 근대화의 구체적 내용을 정립하고 있지도 못한데, 다시 근대화의 역사적 가치가 의문시되는 사태에 직면한 셈이니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다.
시각을 세계로 돌려보면 막강한 자본의 힘이 세계경제질서를 급격히 개편하고 있고, 그 와중에서 상대적으로 약자일 수밖에 없는 국가들의 진로는 그리 낙관적이지 못하다. 더우기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자본의 힘은 세계사적 위기를 결과한 '발전의 논리' 위에서 그 자체 역량의 확대를 멈출줄 모른다. 어떤 면에서는 세계를 추동하는 힘은 이미 경제논리에 빠져 있다. 그래서 세기말의 '위기설'은, 그리고 현재의 지구적이고도 인간적인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들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 앞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 경제 상황과 불투명한 미래는 이러한 세계적 추이와 맞닿아 있다.
사상사의 전개가 항상 역사의 전개와 병행해 왔듯이, 문명의 큰 전환기에서 사상전환의 필요성이 국내외적으로 역설되고 있다. 놀랍게도 사상전환의 방향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동양전통사상에 향해 있다. 물론 그러한 방향전환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우리의 학계와 서구의 학계는 그 맥락상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다.
서구는 근대화가 몰고 온 이 문명사적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서 근대화를 지탱해 온 이념들을 포기하고(예외적인 주장들도 있지만) 동양적 사유로 전회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전통사상의 회복을 주장하는 우리의 분위기는 문명사적 위기에 대한 인식도는 서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엷다. 그보다는 오히려 우리 사회가 노정하고 있는 비도덕적이고 반인간적인 가치혼란의 행태들을 문제삼으면서 전통정신이 지금의 사회를 개량할 관건이라는 맥락이다. 우리 내의 이러한 주장에는 우리 사회를 이 지경으로 몰아 온 원인을 서구문명의 유입에 따른 전통적 가치의 상실 때문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어느새 의식의 근대화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상당히 약화되어 있다)
문명사적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서 혹은 도덕적 황폐에 대한 대안으로서 동양전통사상이 거론되는 것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특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특수한 과제 - 총체적 부패 혹은 가치혼란 -의 해결책으로서 제시되고 있는 전통사상의 회복은, 가능하기만 하다면 우리의 국지적 과제 뿐만 아니라 나아가 세계화의 그늘에서 암울할지도 모르는 우리의 미래에 한 가닥 서광일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정신문화를 새로이 정립해야 한다는 논의들에서 문제해결의 희망이 선뜻 보이지 않는다. (서구의 논의들은 일단 접어둔다) 그것은 전통의 상실을 애도하면서 전통을 살려야 한다는 주장들이 갖는 피상성, 단편성 때문이다. 예를 들면 김충렬 선생은 [21세기와 동양철학]이라는 논문에서 유가의 문화이상은 중용의 정신을 잃지 않는 것과 우주의 한계를 인식하고 成性을 감수하여 도덕적 책임을 져야한다는 점이라고 하면서 정감으로 인간사회의 분위기를 잡아가는 것이 농경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라는 것과 연관하여 21세기의 문화유형을 농공문화로 설정할 것을 제안하는가 하면 논문의 말미에서 心主物從의 가치체계를 세워가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류의 주장은 내용 그 자체로는 시비를 가릴수 없고 다만 그 주장이 시대적 조응성이 있는가로 적합성의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 김충렬 선생의 주장은 당위성은 있다. 그러나 시대적 조응성이 있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첫째, 기술문명의 발전속도와 직간접적으로 기술문명의 발전에 가속도를 붙이고 있는 정치 경제의 복합적 메카니즘을 감안할 때 소위 근대화한 나라에서 農的인 요소가 주가 되는 문명체계로 능동적인 전환을 할 여지는 없다. 더우기 대중이 공업사회 내지 기술사회의 치명적인 폐해를 인지하고 있지 못한 우리의 실정에서는 더욱 그렇다. 둘째, 유가의 문화이상을 지배이데올로기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도 사회전반에 걸친 제도적 모순, 관리들의 부패, 민생의 피폐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터에 전통정신이 지니고 있는 고귀한 가치가 왜 당시의 현실에서 충분히 발휘되지 못한 채 사회적 모순을 드러내었는가를 밝혀내는 선행작업없이 유가의 문화이상을 좇아야 한다는 것은 한낱 당위론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위기상황 혹은 시대적 전환기에 제시되는 대안은 적어도 달라진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조응하고 또한 그것을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적 세계관을 마련하는 지적 탐색이어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역사적 사회적 조건의 변화라는 현실을 도외시한 채 유가의 문화이상을 운운하는 것은 향수에 젖은 쓸모없는 논의일 뿐이다. 이것이 내가 근간에 동양사상을 들먹이는 논의들에서 희망을 볼 수 없다고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도 동양적 대안 혹은 동양적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는 논의들을 배제할 수는 없다. 사회적 질서회복이라는 과제를 넘어서 지구환경적 위기라는 점까지 감안하면 더 이상 어떠한 대안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힘의 논리가 더욱 강력하고 동시에 교묘하게 사회를 총체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누가, 어떻게 의식의 전환을 이끌 것인가? 이 물음 앞에서,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대가들의 사상을 뒤쫓아가기에 급급한, 때로는 그렇게 훈고학이나 하는 것을 철학도의 할 일인양 자부하는 이 땅의 철학계를 생각하면서 회의만 짙어진다. 혹자는 사회의 엄청난 변화상을 거론하면서 현대에서의 동양사상(직접적으로는 유가사상)의 유효성 자체를 의문시한다. 나는 비록 시대적 적응력을 잃어가고 있는 동양철학계에 대해 회의를 가지고 있지만, 현대에서 유가사상의 유효성이 없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상은 시대적 변화에 따라 변용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양사상이 현재 어떻게 유효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지적 탐색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탐색의 출발은 동양사상이 전통사회에서 어떠한 기능을 하였으며 당시의 여러 사회적 모순들과 사상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또한 당시의 부정적 사회상에서 사상은 왜 치유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는지를 짚어야 한다. 이런 고찰은 정치사회적 맥락을 염두에 두면서 해야 할 작업이다. 사상은 어떤 연관에서든지 현실의 정치사회적 맥락에서만 힘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어떻게' 유가적 가치를 현대에 유효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유가사상이 대안이 될 수 있기 위하여 '어떤 노력'들이 전제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구상의 한 부분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 중에서 나는 그 '노력'의 모델로서 정약용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런데 정약용의 노력은 당시에 현실적 실효성을 드러내지 못하였던 바, 그렇게 된 정치사회적 배경까지 천착한다면 오늘 우리가 동양사상을 되살리려는 노력에 있어 타산지석이 될 것이라 본다.
II. 조선에서의 주자학적 사유의 전개
현재 한국사회가 노정하고 있는 문제들의 상당부분이 전통적 가치의 상실 때문이라는 주장들이 무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의 각종 의례와 나아가 우리의 행동과 의식은 유교적 질서감각에 입각해 있다는 것이다. 비록 사회체제의 논리가 유교와는 다른 토대에 서 있는 것이어서 우리의 문화의식이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지금 우리의 일상에서 작동하는 유교적 질서감각은 직접적으로 유교가 조선의 국가이념이었던 것에 기인한다. 우리가 지금 시대지형에 부응하는 새로운 학문적 토대를 창조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단순히 전통에의 복귀가 아니라면, 지나온 역사 속에서 그리고 현재 우리의 삶 속에 녹아 있는 유교적 질서감각이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졌는가를 명확히 짚어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상과 정치사회적 지형이 만나는 접점을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유교사상이 어떻게 정치사상을 장악하고, 어떻게 정권유지를 해 왔는가를 역사적 과정을 통해 고찰함으로써만 유교사상의 흐름과 그 사회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러한 작업 속에서 유교사상의 순기능과 역기능이 드러날 수 있고, 그리하여 깨뜨려야 할 구각에 대한 분명한 비판적 고찰과 새로운 학문적 경향이 마련될 수 있다.
어떻게 유교적 질서감각이 일반화되었으며, 사회체제와 체제를 지탱하는 이념의 총체적인 전환에도 불구하고 그 질서감각이 현대에도 살아있는 것인가? 이것을 달리 말하면 유학이 어떻게 사회적 지배체계와 질서를 합리화할 수 있었는가이다. 이쯤에서 미셸 푸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푸꼬에 의하면 언설로써 조직화된 언어, 즉 담론은 그 사회가 억압하고자 하는 어떤 것을 조직적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그 담론의 생산은 권력에 의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권력은 모든 사회적 관계 안에 내재하면서 선택적, 배제적으로 인간을 조정하며, 이러한 권력행사의 결과로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지식(사회의식)이 형성되고, 그리하여 권력효과는 유지 확대되는 것이다. 푸꼬에게 있어서 권력이라는 개념이 다양하게 해석되기는 하나, 적어도 정치권력의 행사에 있어서 담론이 어떻게 사회구성원의 의식과 행위를 결정해 가는가라는 점에 대한 예리한 통찰은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이다.
조선에서 주자학적 질서가 정립되어 가는 역사적 과정은 권력행사의 도구로서의 지식의 생산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정치적 힘은 언제나 정치권을 어떻게 장악하고 정치질서를 어떻게 유지하느냐의 문제에 집중하게 되는데, 그러한 정치적 과제를 해결해 가는 도상에 유교적 담론(유교사상)이 있다. 조선이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채택한 것도 담론의 맥락에서야 제대로 이해된다. 물론 고려에서도 유교는 치국의 정도로 숭상되었던 것이나, 려말의 성리학 도입 이후 신진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지도이념으로 삼아 려말의 사회개혁의 무기로 삼은 것으로부터 조선의 국가이념으로 채택된 데에는 새로운 정치질서의 확립에 근간이 되는 사상이 주자학에 있기 때문이다. 즉 조선의 성리학에서 理와 氣의 선후차성 문제가 핵심적인 문제로 제기되고 이를 중시한다는 것은 결국은 봉건적 도덕질서를 합리화하고 그로써 봉건통치계급의 정치적 지배를 사상이론적으로 합리화하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정치의 주요한 과제가 사회적 지식(담론)을 형성함으로써 정치질서를 확립하는 것이라는 점과 연관하여 성리학자들은 (정확하게는 관료유학자들이다)통치사상을 주도하는 첨병이었다. 관학파들이 왕조의 체제정비와 조선 초기 유교문화를 조성하기 위하여 제도문물의 정비와 주자학적 실천윤리의 보급을 실시하였던 것은 15세기라는 역사 흐름의 독자적인 요청에 부응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 관학파들은 그들의 현실적 목표에 걸맞게 사상을 탄력적으로 운용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는 관학자들의 '불교사상에 대한 태도'를 들 수 있다. 조선조 초기에 유학의 기초를 확립한 정도전이 유학의 입장에서 불교와 도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과는 달리, 세조조의 신숙주, 최항, 강희맹에게서는 理 관념의 약화와 더불어 불교 등 이단사상을 보다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들이 기본적으로 주자학자이면서도 주자학에만 치우치지 않고 탄력성있게 사상체계를 운영하였던 것은 주자학이 자신들의 역사적 입장을 관철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이론적 무기가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었으리라. 이렇듯 주자학적 인식이 체제정비와 더불어 약간 굴절되는 것은 과도기적 정치지형에 따른 조응성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여하튼 15세기가 지니는 역사적 특이성에 부합되는 관학파의 사상적 작업은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의 면모를 뚜렷이 나타나도록 하였다.
관학파 외에 사림파의 선구들(소위 도통계열의 유학자들)의 학문적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들이 후에 사림파라는 정치세력의 사상경향을 기초지웠다는 점을 제외하면, 적어도 15세기에 그들의 사상은 정치권의 영역에서는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초기집권층이 유교적 사회통합론을 표방하면서도 다른 한편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향촌사회의 비유교적인 행위들(淫祀의 행위가 대표적이다)에 대해 유연했던 것과는 달리, 이들 在地士族들은 성리학적 이념, 성리학적 윤리에 입각하여 철저히 향촌질서를 확립코자한 점에서 그들의 활동은 유교적 사회문화 정립에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성종대에 관학파(훈구파)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가 중앙관계에 진출되면서부터 야기되기 시작한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에서 16세기 조선성리학의 성격은 15세기와 달라진다. 사상은 정치사회적 연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은 단순히 정치사적 측면의 사건이라기 보다 사상대결사 혹은 사상적 갈등사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대표적 성격을 사림파 철학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훈구파와의 대립에서 훈구파의 철학사상을 극복해야 할 필요성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이 양파의 사상적 갈등은 표면적으로는 주자학적 원리의 현실에의 적용을 둘러싸고 나타나지만, 그러한 표면적 갈등의 기반에는 철학적 세계관, 인간관, 경세의 기본원칙에서의 차이가 있었다. 그 차이는 우선 조광조의 경우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후기관학파들에게서 나타나는 理 관념의 약화에 대해 조광조는 理學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그가 주장하는 王道나 王政은 一理로 통관되었는바,이 一理가 곧 仁이요 만물을 생생케하는 生理이다. 이렇듯 조광조는 훈구파 계열의 사상과 대비되는 세계관에 입각하여 그의 경세를 위한 제도개선의 주장들을 하게되는 것이다. 중종 때 문헌의 구비와 유포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이 학문진작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겠지만, 정치사회적 측면에서 보자면 이학, 정학, 도학, 성리지학 등의 용어가 그 당시에 유독히 유행했던 것은 당시의 사림제현(을묘사화때 훈구파에 의해 거세된다: 을묘제현)들이 정주학이 정학임을 분명히 하는 것을 그들의 역사적 소임으로 인지했음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이것은 후기관학파(훈구파)의 사상이 전형적인 주자학과 달라지는 데 대한 사상적 반동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하여 士禍라는 역사적 현상형태를 거치면서 사림파의 철학사상은 理學的 세계관으로 더욱 발전하게 된다.
요컨대 16세기 전반까지의 유학사상의 흐름을 일별하면 단순히 학파의 사상적 경향의 차이에서 성리학적 입장의 차이가 발생했다고 보는 것은 너무 소박한 견해인 듯하다. 권력관계 및 국가체제운영의 측면에서 사상은 정치지형에 따라 변용, 굴절되거나 또는 기득권 세력을 극복하는 형태로 사상이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교적 질서로 사회를 정립한다는 과제에 있어서는 각각의 사상들은 공통적이었으며, 다만 현실정치에 운용하는 방법적인 차이가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즈음에 실시되기 시작한 향약도 이상적 유교문화의 보급이라는 차원에서만 이해되어서는 안되겠다. 향약 또한 권력문제와 밀접한 연관에서 볼 때 조선의 유교문화 정립의 배경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예컨대 중앙과 향촌은 정치적 지배력의 행사에서 항상 대립할 소지를 갖고 있는데, 향청을 통해 중앙권력을 적극적으로 보좌하게 하여 중앙집권화를 더욱 돈독하게 하거나 정반대로 지방분권화를 통해 중앙과 향촌과의 대립을 완화시키려고 하거나 등의 정치적 목적을 배제한 채 향약은 제대로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어떻든 정치적 목적 아래서 실시되었기에 향약 보급 이후 서민들의 생활에 유교정신이 더욱 침투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유교문화적 의식(이상)은 정치사회적 지형이 만들어낸 소산이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사화를 겪으면서 정계를 등진 사류들이 사색적 학풍에 심취되면서 순수한 성리학적 학문에 몰두했다는 인식 또한 소박하다 아니할 수 없다. 그들에 의해 성리학이 발전한 것은 분명하지만, 사류들이 서원을 중심으로 학문활동을 하거나 혹은 山林으로 은둔한 경우에도 그들의 학문이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이었다고 단언할 수는 어렵다. 17 -8세기를 이어가는 당쟁의 역사에서 사류들이 문벌, 붕당에 따라 어떻게 당쟁에 동참했는가를 보라. 또한 17세기는 사림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가장 강하였던 시기로 볼 수 있는데, 사림들이 제시한 권력구조를 통하여 대신의 위상과 직권에 변화를 불러 올 정도였다. 즉Ⲡ사림들은 권력재편을 의도하는 정치적 조직체로서 기능하였고, 그러한 기능을 가능케 한 기반이 그들의 당파별 학문성향이었다. 더우기 당쟁의 시발이 각 학파별 사상의 차이로부터가 아니라 권력을 둘러싼 이해관계로부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특히 복상문제를 계기로 벌어지는 당쟁의 역사에서 禮說 그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당쟁을 위해 유학이 도구로 이용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조선조 유학사상의 흐름을 순수한 학문적 경향으로 보기 어렵다. 나중에 다시 언급되겠지만 사상과 정치관계와의 이러한 밀접한 관련은 오늘날 우리가 전통유가사상을 되살려야 한다는 주장들이 피상적으로 될 때 현실에서 어떠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지에 대해 하나의 반성의 실마리를 준다. 왜냐하면 <이념적으로 무엇이 표방되고 있느냐>와 <현실정치에서의 작용이 사회현상과 사회의식을 어떻게 만들어가느냐>는 별개 문제일 수 때문이다.
조선사회를 주자학적 질서로 재편하려는 노력은 사림파가 득세하는 선조대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는데, 이는 사림파가 중앙정치권력을 쥐고 사상적 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주자가례}와 {소학} 등에서 규정된 실천규범이 향촌사회까지 보급되고 가부장제와 적장자 우위의 상속제도가 일반화되는 것 등 주자학적 사회질서의 착근을 보여주는 지표들은 조선사회에서 16세기 후반 혹은 17세기에 이르러서야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주자학적 사회질서가 정립되는 것과는 별도로 조선왕조의 현실은 국가이념과 괴리되는 부조리함을 드러내었는데,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이념을 현실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구조적인 것이었다. 유교적인 왕도정치는 양반들의 세력균형을 기반으로 해야 안정되는 것인데, 신분세습에 의한 양반신분층의 숫적 증가와 인재등용의 한계성으로 하여 양반 관료 사이의 대립과 분열은 격화되어 갔다. 결국 당쟁이라는 것도 권력과 경제력을 에워싸고 일어난 관료간의 정치투쟁이었던 것이고, 그러한 당쟁이 지속적으로 진전되면서 일당의 세력팽창현상과 더불어 양반관료들의 세력균형이 무너지게 되면서 왕권은 약화되었다. 유교적 정치가 군주권의 약화를 불가피하게 만든 것이었다. 왕권을 강화하고 왕권이 정상적으로 운용되는 정치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정조 당시 탕평책이 도입되었지만, 사회경제적 전반에 걸친 불안과 부조리는 불식되지 못하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경제체제내의 변화(농업의 상업적 영농, 노비제 이완, 私商都賣의 대두, 대동법실시에 따른 貢人의 등장 등)는 전통적 신분질서가 붕괴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있어서의 심각한 질적 변화는 당시의 시대적 위기상황을 노정하였다. 당시 정치경제적 지형의 이러한 변화에서 주자학적 사회규범은 변동되는 사회와 부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학문사상의 지배적인 조류는 더욱 주자일변도로 강화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학문의 이러한 경향은 당시의 시대적 위기상황이 성리학적 세계관의 결함과 오류로부터가 아니라 그것의 불완전한 또는 잘못된 적용에서 연유하였다는 인식틀 속에서 종래의 성리학적 통치 이데올로기를 한층 더 교조적으로 강화시킴으로써 현실의 위기를 타개해 나가고자 의도했던 송시열, 한원진 등의 입장이 확대전개된 것이라 보여진다. 다른 한편 기존의 성리학의 세계관과 통치이데올로기의 한계성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반성과 비판적 입장을 나타냈던 자들은 성리학의 경직되고 협애한 인식틀, 주자학적 사회규범이나 순수한 이론적, 추상적, 비실용적인 학풍을 벗어나 보다 근본적인 수준에서 현실개혁의 논리와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윤휴, 박세당, 정제두, 이익 등이다. 위기상황을 극복해 나가려 했던 두가지 방향에서 후자의 입장으로부터 조선의 경학이 발전하거니와, 이것이 또한 시대적 조응성 있는 사상의 발전이라 하겠다.
III. 시대적 요청으로서의 정약용의 탈성리학적 해석
경전에 대한 해석은 조선의 여러 유학자에 의해 행해지지만, 조선 중기까지는 주희의 집주,집전을 이해하는 수준에서 官房的 해석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실학파에 이르러서 經學은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개혁과 경장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니게 된다. 따라서 실학파의 경학은 경세학에서의 구체적인 논의들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근거, 기반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경학은 '새로운 세계관'을 의미있게 개진하는 지적활동이자 방법이며 동시에 기존의 세계관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활동이다.
경학이 역사적 사회적 조건과 결부된 구체적인 경세학의 근거이며, 기존의 세계관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경학은 단순히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과 결부된 권력의 문제가 된다. 경학이 조선사회의 계급간 혹은 지배계급내 상이한 이해집단간의 갈등현상을 그 뿌리로 소급하여 투쟁하고 있다는 점에서 권력의 문제이고, 동시에 언어의 의미를 둘러싼 논쟁이 권력의 현실기반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역시 권력의 문제이다. II장의 초두에 정치권력이 생산하는 담론의 문제를 언급한 바 있는데, 경학이 지배적 담론인 성리학적인 해석에 저항했다는 점에서 경학은 저항적 담론이라 할 수 있겠다.
조선조 후기의 시대적 위기상황에서 사상적 반성과 사유의 전환의 절실성을 인지하고, 당시의 사회경제적 현실을 예리하게 분석한 토대 위에서 성리학에 대신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해 낸 대표적 인물로 다산 정약용을 꼽는 것은 異論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우리가 사상의 시대적 유효성을 염려한다면, 같은 맥락에서 처절한 고뇌와 각고의 노력으로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던 정약용을 되돌아보는 것은 이 시점에서 무엇보다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다산의 학문체계는 워낙 방대한데, 이글에서는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다산이 시대적 조응성이 약화되고 있는 성리학에 대해서 어떻게 비판적 입장을 개진했는지를 {論語}에 대한 다산의 해석인 {論語古今註}를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는 것으로 그치겠다. 내가 {논어고금주}를 참고로 하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전통적 사상의 틀을 깨뜨리고 하나의 새로운 경향을 창조해 낸 다산사상의 기본요점 및 중심개념을 짐작할 수 있거니와, 사상에 있어서 선행자들과의 연관성과 다산이 깨뜨리고자 한 구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논어고금주}는 다산 스스로 {自撰墓誌銘}에서 술회하듯 漢魏 이래 明淸에 이르기까지의 경설을 수집하여 종신토록 연구한 성과로서, 크게는 古註로서의 漢註와 今註(新註)로서의 宋註를 하나로 묶어서 絶長補短한 방대한 저술이다. 거기서 다산은 논어 총 521절 중 175항에 걸쳐 독자적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는 다산이 고금주 어느 것에도 국한되지않고 새로운 입장에서 洙泗學的 古義를 밝혀내고자 한 증거가 된다 하겠다.
다산이 탈성리학적 입장을 취했다고 하나, 성리학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성리학의 근본적 가치에 대해 인정하면서 다만 당시 성리학의 말폐적 현상을 비판 한것이다. 즉 성리학 관념의 공소성, 난해성으로부터 야기되는 끝없는 탐구 및 분당분파적 쟁송의 폐해를 없애고 유학 본연의 영역과 정신 및 실천을 회복하려는 것이 다산사상의 핵심이다. (당시 교조적으로 되풀이하던 언사나 발상과는 얼마나 다른가?)
실천성을 강조하는 다산의 사상은 天, 仁, 德, 禮, 孝 등의 개념에서 주자와는 다른 해석을 보여준다.
다산사상의 탈성리학적 경향의 이론적 핵심은 事天의 불충실로부터 충실한 事天으로의 전환이다. 다산은 신앙과 제사의 대상이었던 天에서 그 신격을 배제한 것은 유교를 오류에 빠지게 한 근본적 원인이라고 본다. 이는 직접적으로 주자의 天觀에 대한 비판이다. 주자는 性卽理의 사고를 바탕으로 하여 인간과 만물에 부여된 生生之理로서의 태극을 天으로 이해하였다. 다산은 天을 理로 간주하는 성리학자들의 관념이 修己와 治人에 있어서 진실성, 자율성의 문제를 일으킨다고 하면서, 인륜실천의 진지함, 성실성은 무엇보다도 天과 귀신을 경건하게 섬기는 자세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그리하여 다산사상에서 事天은 인륜과 치인의 실천의 기본요건으로서, 天은 上帝라는 인격적 존재와 동일시된다. 다산의 天觀으로부터 天命에 대한 이해가 결과된다. 다산은 천명을 人性의 命과 상제의 명으로 나누어 이해하는데, 전자는 인간의 성품으로 부여된 명령 즉 선을 향하고 악을 멀리하게 하는 靈知之性이요, 후자는 모든 일상사건을 통해 부여되는 명령이다. 이러한 다산의 천명관은 윤리관의 재정립이라는 시대적 과제와 결부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산은 원시유가에서 나타나는 天의 인격적 의미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철학체계의 중추로 삼은 셈이다. 天관념을 다산사상의 중추로 보는 이유는 天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天人관계의 양상이 달라지고, 나아가 修己의 방식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天을 일종의 법칙성으로 인식할 때 철학의 성격은 관념성 추상성을 띠지만, 天을 인격적 존재로 인식할 때 그 철학은 보다 실천적 성격을 띠게된다. 다산의 天관념에서 우리는 그의 실천이론의 특징을 간파할 수 있다.
한편, 주자는 仁을 愛之理, 心之德으로 풀이한다. 이는 仁을 인간내면에 실재하는 가치의 실체로서 파악한 것이다. 다산은 "인의예지의 이름은 행사 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남을 사랑한 후에야 인이라 일컬으니, 남을 사랑하기 전에는 인의 이름이 성립될 수 없다. ...어찌 인의예지 낱알이 복숭아씨, 살구씨와 같이 사람의 마음 가운데 숨어있는 것이겠는가? 안연이 인을 물으니 공자가 극기복례하여 인을 행한다고 말한 것은 인의 물건됨이 사람의 노력으로 성립됨을 밝힌 것이지, 처음 태어날 때부터 하늘이 사람 마음에 한 알의 인을 넣게 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성리학에서 인을 형이상학적 선천적 내재적 본성(性卽理)으로 간주하는 것을 비판한다. 다산은 실천궁행을 통한 후천적 결과로서 인이 성립됨을 주장하는데, 이러한 다산의 이해는 당연히 四端과 四德의 관계에서도 성리학과 다른 입장을 드러낸다.
주자는 仁의 端인 측은지심을 理가 발하는 것으로 본다. 즉 인의예지의 사덕이 理로서, 우리의 선천적 본성으로서 있고 그 덕이 발한 것이 사단이라는 것이다. 주자의 이런 입장은 그의 철학체계 즉 理氣論的 性情論的 체계안에 사단과 사덕을 배치하기 때문이다.
다산은 性卽理라는 성리학의 대전제, 性에서 情으로의 體用論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性이란 心의 경향성일 뿐이다. [하늘로부터 받은 천리]라면 어찌 다시 실천에의 적극적 의지가 필요할까"라고 지적하면서 인간 성의 본질은 사단으로, 자기 내적 본질인 사단을 자기외적 관계의 장에서 확장할 때 비로소 성취되는 덕목을 사덕으로 파악한다. 사단과 사덕에 대한 다산의 해석학적 근거는 [端]에 있다. 주자는 [단]을 (숨겨진 사덕을 확인할 수 있는) [비죽 나온 실마리 (緖)]로 읽었지만 다산은 [단]이 [끄트머리]가 아니라 [시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었다. 말하자면 다산이 이해한 [단]은 그것을 바탕으로 인간성의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발판이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주자는 內德外端說이고 다산은 內端外德說이다. 주자의 內德說에 따르면 덕은 천명에 의하여 본구한 것이나, 다산의 外德說에 따르면 덕은 직심이며 다만 실천에서만 나타나는 것이다.
四端 四德에 관한 주자와 다산과의 입장의 차이는 '道之以德 齊之以禮'(위정)의 해석에서 판연히 드러난다. 주자는 齊之以禮를 사람의 마음의 천심후박의 불일치를 예로써 고르게 한다는 추상적 해석을 내린다. 이런 해석을 내리는 것은 주자가 禮를 天理의 절문으로서의 禮 혹은 理로서의 禮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다산은 "덕으로써 백성을 인도하고 예로써 가지런히 하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덕은 孝,悌, 慈 즉 인륜의 실천을 수범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齊之以禮는 왕가, 대부, 사, 서인 등이 사용하는 예가 각각 다르고, 엄격히 가려써야 한다는 것, 즉 尊尊의 원리를 사회의 구성원리로 정립한다는 것으로서, 君君 臣臣 父父 子子의 正名이 사회운영의 원리 임을 강조한다.
주자나 그를 추종하는 성리학자들은 예를 통하여 천리 혹은 당연지리의 실천을 강조하나 , 다산은 예를 통하여 진정의 발출을, 그리고 절제(中)를 강조한다. 말하자면 예와 덕을 통한 교화가 정치의 기본이라는 점에서는 모든 유학자들이 일치하지만 다만 성리학자들은 예와 덕을 인간내면의 일로 생각하나, 다산은 예와 덕의 의미를 인간관계 혹은 사회적 계급관계에서 인화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한다.
인의예지와 마찬가지로 효제도 修德의 명칭이므로 그 완성은 바깥에 있는 것이지, 즉 실천으로서만 드러나는 것이지 결코 내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다산은 이해한다. 다산은 효제와 인은 같은 것으로 보되 다만 인은 총명이요 효제는 전칭이라고 규정하면서 인은 포함하지않는 것이 없고 효제는 오직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는것이 그 실이 되므로 인 중에서 효제가 그 근본이 된다고 하였다.
{논어} 里仁편에 '吾道는 一以貫之'라는 귀절에 대해서도 다산은 기존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한다. 주자는 一을 一理로, 또 "一은 一心이며 實은 萬事"라 하면서 一은 忠으로, 以貫之者는 恕로 이해한다. 대부분의 학자들도 一을 理나 心 혹은 仁으로 이해한다. 이에 대해 다산은 中心으로 남을 섬기는 것을 忠, 다른 사람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헤아리는 것을 恕라고 정의하는데, 이런 다산의 정의는 충서 양자가 모두 실천의 덕임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따라서 그는 주자의 해석처럼 先忠而後恕로 생각하여 충이 안에 있고, 이로부터 미루어 발하는 것을 恕라고 생각하는 것은 二以貫之이지 一以貫之가 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그리하여 다산은 {고금주}에서 '바야흐로 충을 실행할 때 恕는이미 오래전부터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一以貫之의 一을 恕로 이해한다. 결국 忠恕는 곧 恕이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의 恕字로 행하는것이라고 다산은 이해한다.
몇 가지 개념을 통해 간략히 다산사상을 미루어 본 바, 우리는 다산사상의 핵심이 실천성에 있음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더우기 그는 실천을 강조함에 있어 당위론적인 수준에서가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철학체계를 구축하면서 그 토대 위에서 기존의 관점들을 극복하고 있다. 다산이 성리학 비판을 통한 새로운 철학체계 수립의 기초를 훈고의 방법을 통한 어의의 명료화에서 구하면서, 성리학의 용어 및 그 개념들을 철저히 분쇄해가는 작업에서 시대를 고민하는 학자로서 어떠한 노력을 해야하는지를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당대의 사회정치적 모순을 통렬히 자각하는 것, 그 모순을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지식인으로서의 소명감을 철저히 하는 것, 사회정치적 모순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근원적인 수준에서 찾아가는 것등이 다산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다산의 새로운 철학체계의 수립은 당시의 사회정치적 모순이 일차적으로 성리학적 수양론의 바탕인 性卽理의 세계관과 體用의 인간학에 있음을 파악한 그의 철학적 과제였던 셈이다. 나아가 자신의 경학적 입장을 경세학에까지 운용하였으니, 요컨대 다산은 전환기에서 해석작업을 통한 새로운 의미창출의 노력을 한 전형이라 하겠다.
IV. 유가사상의 해석학적 과제.
나는 유가사상이 현대에서 어떻게 유효할 수 있는가라는 화두를 던져놓고, 조선시대 유가사상이 권력관계 속에서 어떻게 기능하며 또 어떻게 굴절되었는지를 가늠하면서, 사회적 위기에 직면하여 그 극복을 의도하는 다산이 학자로서 취한 시대극복의 방법을 일별하였다. 이러한 고찰을 한 이유는 사상은 현실의 다양한 지평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그 기능(힘)을 발휘한다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누구나 말하는 바대로, 유가사상의 핵심은 修己와 治人이다. 소박하게 이해하면 수기란 남과 관계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가일 터이고 치인은 두루 관계맺어지는 사람들의 질서를 '어떻게' 잡아가느냐의 문제일 터이다. 결국 유가사상은 (사실 다른 사상도 마찬가지이지만) '어떻게'라는 글귀에 해당하는 사람살이의 근본을 '말'하는 것이고, 그 '말'이 사람살이의 토대가 될 때 사상은 사상으로서의 유효성을 지닌다.
그런데 그 '말'은 어떻게 우리에게 오는가? 어떻게 그 '말'이 우리의 의식이 되고 우리 행위의 나침반이 되는가? '말'의 힘일까? 그 '말'이 말해지는 배경의 힘일까? '말'의 힘일수도 있고 배경의 힘일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말'의 힘만으로는 그것이 우리의 의식이 되지도 않고 우리 행위를 이끄는 나침반이 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우리는 {논어}를 읽으면서 仁에 대해 , 군자에 대해 그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해석한다. 仁이 가치로운 것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 해석작용이 있어서이다. 동시에 해석에 의해 의미가 부여된 '말'이 우리에게 의미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배경(통로)이 있을 때 仁은 우리에게 가치가 된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에게 의미가 되지 않는 '말'은 더 이상 '말'이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상의 - 말의- 힘이 발휘되기를 희망한다면 선행해야 할 조건은 '말'에 힘을 실어주는 일(즉 의미작용, 해석작용)이고, 그 '말'의 유효성을 담보하는 현실의 필요조건은 배경의 힘이다Ⲡ
철학이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고 그리하여 그 현실의 극복이 철학의 과제라면, 지금 철학이 해야 할 일은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말'이 우리에게 '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의 힘과 배경의 힘이 함께 갖추어져야 한다. 다산은 경학연구를 통해 실천성을 고양할 수 있는 새로운 철학체계를 구축하지만, 다산의 '말'은 그 '말'이 유포될 수 있는 권력배경을 갖지 못함으로써 현실적 실효성을 얻지 못하였다. 이는 배경의 힘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 '말'의 힘이 어떻게 무력화되는가의 대표적인 예이다.
시대진단을 솔직하게 한다면 유가의 '말'은 지금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 '말'이 사람살이의 근본이 되었던 시대로부터 지금의 역사사회적 조건이 상당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의 삶을 추동하는 힘은 유가의 '말'로부터가 아니라 다른 '말'로부터 온다. 현재에 유효한 '말'들은 자유, 실리, 발전, 편리, 안락 등등 무수히 많다. 그리고 정치는 이 '말'들의 코드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면서 재생시키고 있다. 이것이 그 '말'들의 유효성을 지속적이게 하는 배경의 힘이고, 모든 생활영역을 포괄하는 정치의 지배능력은 바로 여기서 생긴다. 그 '말'들의 가치적 질서를 전복하지 않는 한, 바꾸어 말하면 그 '말'들에 힘을 실어주는 배경이 바뀌지 않는 한 유가의 '말'은 이 시대에서 겉돌 뿐이다.
유가의 '말'이 우리에게 오지않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말'은 兩價性을 포함한다. 엄격히 말하면 '말' 자체에 양가성이 있다기 보다 '말'이 의미되는 정치사회적 맥락 속에서 양가성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孝弟者也, 其爲仁之本與](學而) [孝慈則忠](爲政) 등의 '말'은 인간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되기도 하고 가족주의 내집단주의가 되기도 한다. 오늘날 親疎에 따라 의당성을 저버리는 온갖 행태와 극심한 가족이기주의가 인륜이라는 허울을 쓴채 자행되고 있음의 뿌리도 실은 저 유가적 '말'에 있지 않은가? 조선조의 禮訟도 마찬가지다. 節을 지키고자 하는 禮의 본래 정신은 간데 없고 망국적 의례주의를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일제시대에는 공공연히 <유교망국론>이 나돌았다. 또한 지금에도 이 사회 부조리의 한 뿌리는 유가적 '말'로부터 비롯한 역기능이다. 그런데도 '말'의 양가성, 나아가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그것이 어떻게 역기능을 초래하는가에 대한 반성을 소홀히 한채로 지금 다시 전통사상의 회복을 강조한다면 그 '말'이 우리에게 의미있는 것으로 다가오겠는가?
그리하여 유가사상이 현대에서 유효할 수 있기 위해서는 유가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새로운 해석학적 과제를 짊어져야 한다. 그것은 마치 다산이 그 시대 지형에서 시도했던 노력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오늘의 해석학적 과제를 수행하는 작업은 복합적인 노력을 필요로 한다. 유가적 '말'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인식과 그 역사적 상황 속에서 '말'을 해석하는 작업, 지금 우리의 역사적 상황을 해석하고 보다 새롭게 우리의 역사적 상황에 접근하는 작업, 그런 연후에 보다 새롭게 유가적 '말'의 해석을 철학적 체계를 바탕으로 수행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이 작업은 사상이라는 영역을 뛰어넘는 총체적 지식을 요구한다. 다산은 적어도 자신의 역사적 상황에서 총체적인 시각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사실 시대지형을 횡단하여 총체적으로 시대를 읽어내는 역량은 철학도의 필수적 교양이다. 오늘의 역사사회적 조건이 그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면, 학문 간의 연대를 통해서 그 난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각 영역별로 분할되고, 영역 사이의 회로가 폐쇄되어 있는 경직된 학문풍토를 깨고, 각 영역들이 상호관계체계를 만들어 공동연구를 한다면 오늘의 해석학적 과제는 새로운 국면에서 그 해법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철학이 현실과 조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철학이 아니다. 현실과의 조우는 다양한 지평에서 이루어지지만 내가 이 글에서 특히 주목하고자 했던 바는 사상이 정치사회적 연관에서 어떻게 왜곡, 굴절되는가 혹은 무력화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이것에 주목한 이유는 오늘날 유가사상을 새로운 정신문화로 착근시킴에 있어서의 결정적 변수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진정 유가사상이 시대 위기의 대안이 되어야 한다면 선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 그 과제의 한 축은 존재와 인식의 범주를 새롭게 정립, 재정의하는 사상체계의 정립 및 이에 따른 현실에서의 이데올로기적 해명이고 또 다른 한 축은 그것이 총체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방법의 모색 및 그 방법의 구체적 실천이다. 전자가 유가사상에 있어서의 학문적 과제(즉 해석학적 과제)라면, 후자는 사회적 실천의 과제이다. 사회적 실천은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시대지형에 부응하는 사회과학적 기획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실천의 기획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현재의 역사사회적 조건에 조응하는 유가사상의 새로운 해석체계부터 마련되어야 한다. 이것이 유가사상의 현대적 과제이고, 유가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짊어져야 할 시대적 의무이다. 내가 이 글에서 조선시대를 호명한 것은 조선에서 권력이 자기보존을 위하여 상이한 해석을 이단으로, 사문난적으로 몰아갔던 것, 유가적 '말'의 순기능이 정치연관에서 '역기능'을 노정했던 것등의 메카니즘을 짐작하여 오늘의 새로운 해석 과정에 참고하기 위해서였다.
[Abstract]
The Contemporary Task of Confucian Ideas
Ha Soon-Ae (Cheju College)
This article is an attempt to find out how can make Confucian ideas available to modern society? I choose this subject as following reasons : the first reason why I choose this subject is that these days Confucian ideas or Oriental are being represented not only as alternative of the moral fall in Korean society, but also as the alternative of human civilization in crisis. on the other hand, I choose this subject on reason that the present social contradictions cannot be solved in modern society of great epoch-making change only by insisting on restoring the values of Confucian Ideas.
Therefore some questions must be raised in order to search for the way to realize Confucian Ideas responding to the present social conditions : That is, How could they rationalize the ruling system and the social order with Confucian Ideas? What kind of relationship could be between the social contradiction and the Confucian Ideas in those days? What prevented Confucian Ideas in Chosun Dynasty from restoring its self-cure power in facing a very unfavorable social situation against itself? and so on.
This study is an attempt to comprehend the historical current of Confucian Ideas and its social significance, by taking notice of the intersection between the Political situation and the Confucian Ideas, and by surveying how Confucian Ideas controlled political ideas and how Confucian Ideas kept in power. This study reveals what kind of positive and negative faculties Confucian Ideas brought about in relation to political system or ruling system.
This study I took notice of how Confucian Ideas was bent, distorted, and has been powerless according to political and social situations. Therefore this study showed that, what kind of problems can arise from the doctrine of Confucian Ideas Restoration, if it were not for any consideration of political and social situations.
Setting up the above discernment as clue to solve the questions, I propose that the Scholars, who study Confucian Ideas in these days, should be burdened with the task of the modern times. The task of the modern times in the hands of Confucian scholars is to establish the new interpretation system to apply the Confucian Ideas appropriately to contemporary historical and social situations.
새한철학회 논문집 - 철학논총 16, 199902
하순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