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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1762-1836)/大學公議

大學公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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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公議 1

 

《禮記》는 모두 49편인데, 鄭玄의 목록에 의하면 42편이 <大學>이다. 鄭端簡은 그의 《古言》에 孔伋이 송나라에서 가난하게 살 때 <大學>을 지어 날로 삼고 <中庸>을 지어 씨로 삼았다고 한다. - 자세한 것은 中庸 自箴 참조

 

내가 생각해 보건데 예전 학자들이 <中庸>은 子思가 지었고 <緇衣>는 公孫尼子가 지었다고 했다. 鄭康成은 <月令>은 呂不韋가 지었다고 말했다. 盧植은 <王制>를 漢文帝때의 박사들이 기록한 것이고 <三年問>은 荀卿의 저술이며 <樂記>는 河間獻王때 여러 유생들이 편집한 것이라고 했다. 이것들은 모두 근거가 있지만 <大學>이 누구의 작품인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鄭端簡의 말은 賈逵의 말을 인용한 것인데 이것은 꾸며낸 것이 분명하다. 朱子는 曾子가 經 1장을 지었고 증자의 제자가 傳 10장을 지었다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다. 朱子는 孔子의 道統이 曾子에게 전해지고 그것이 子思와 孟子에게 전해졌다고 보고 子思와 孟子는 저서가 있지만 曾子는 저서가 없으므로 <大學>을 가져다 그 道의 명맥을 잇고자 한 것이다.

 

요즘 내가 듣기로 翁覃溪의 문우인 阮元이 《大戴禮》의 <曾子> 10편을 들춰 내 주석을 달고 해석했다고 하는데 이 또한 道統이 계승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10편 <天圓>은 글이 잘 맞지 않는 듯하다.

 

<宋史>에 仁宗 天聖 8년에 <大學>을 과거에 급제한 王拱辰 등에게 내려주었다고 되어 있다.

 

내가 보기에 요즘 학자들은 이것에 근거해서 송나라 인종 때 <대학>이 이미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거나 韓愈가 《原道》라는 글에서 따로 <誠意> 장을 표시하였으므로 당나라 때 이미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고 하지만 모두 사실이 아니다. <大學>을 들추어 낸 것은 두 程子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大學>이 四書의 대열에 끼게 된 것은 원나라 仁宗의 八比法에서 <朱子章句>를 취했기 때문이다.

 

大學之道 - 大는 太라고 읽는다.

 

大學이란 國學을 말한다. 이것은 제왕과 경대부의 맏아들을 놓고 가르치는 것을 뜻하니 大學의 길은 맏아들을 가르치는 방법이다.

 

옛날 음으로 大를 太로 읽는 것을 지금 사람들이 大로 읽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大學之道’라 한 구절은 <大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禮記》의 <學記>에는 ‘大學의 도는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꺼이 복종케 하고 멀리 있는 사람은 마음으로 따르게 하는 것’이라 써 있고 ‘大學의 교육은 제 때에 가르치되 반드시 先王의 업적을 가르쳐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렇게 글자의 예나 구절의 예가 이 經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데 저기서는 ‘태학’이라고 읽고 여기서는 ‘대학’이라고 읽는 것은 바른 것이 아니다.

朱子가 서문을 지을 때 <大學>으로 太學에서 가르치던 법이라 했지만 사실상 옛날 太學에서 가르치던 법은 禮樂, 詩書, 絃誦, 춤, 中和, 孝悌로 가르쳤다. 이것은 《周禮》에도 나오고 《禮記》의 <王制>, <祭義>, <文王世子>, <大戴禮>, <保傳> 등에도 나타난다. 明心復性, 格物窮理, 致知主敬이니 하는 제목은 옛 문헌에서는 찾을 수 없다. 더욱이 誠意니 正心이니 하는 것들도 학교의 조례가 될 만한 뚜렷한 글귀가 없다. 이 때문에 朱子는 책이름을 글자대로 읽게 하고 大人의 학문이라 해석하여 <小學>과 짝을 이루어 온 세상 사람이 두루 배울 수 있는 학문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여기서 大人이란 것은 결혼한 성인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결혼한 성인을 大人이라 부르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기로 大人이라 부르는 칭호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지위가 크고 높은 사람, 둘째는 인격이 훌륭한 사람, 셋째는 아버지, 넷째는 몸집이 큰 사람이다. 이들을 제외하곤 어느 누구도 大人이라 할 수 없다. 《周易》에 ‘大人을 만나면 이롭다’하였고 孟子는 ‘大人과 이야기할 때조차 그를 가볍게 여기라’고 했으며 또한 ‘大人의 일이 있고, 小人의 일이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말한 것이다. 옛날에는 오직 天子나 諸侯만이 이런 칭호로 불렸다. - 春秋左氏傳 襄王 30년 卿大夫도 大人이라 불렀다. 《周易》에 ‘大人은 천지와 더불어 그의 德이 일치한다’, ‘大人은 범처럼 변한다’고 하였다. 孟子는 ‘大體를 기르는 사람은 大人이 된다’, ‘大人은 어린아이 때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 ‘오직 大人만이 잘못된 군왕의 마음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했다. 이것들은 인격이 훌륭한 사람을 말 한 것이다. 漢高祖가 술잔을 받들어 太上皇에게 올릴 때 大人이라 일컬었고 霍去病이 그의 아버지 中孺를 만나서 ‘제가 大人의 遺體가 된 줄 몰랐습니다’와 같이 말 한 것들은 아버지를 다른 말로 부른 것이고 《山海經》에 ‘동해 밖 아득한 가운데 大人의 나라가 있다’고 한 것은 몸집이 장대한 사람을 이른 것이다. 옛 문헌들을 일일이 살펴보아도 결혼한 사람을 大人으로 부른 경우는 없다.

옛날에 小學이니 大學이니 하는 구별은 원래 재주와 학업의 크고 작은 것 또는 글방의 크고 작은 것을 둘로 나눈 것이다. 그 때의 나이를 15세라 하기도 하고 - 白虎通 혹은 20세라 하기도 했으나 - 書經 결혼을 하고 안하고는 아무 언급도 없으니 결혼한 사람만이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옛날의 학교제도를 지금 자세하게 알 수는 없으나 上庠, 下庠, 東序, 左學, 東膠, 虞上 등이 <王制>에 나타나있고 東學, 南學, 西學, 北學, 太學 등이 <保傳>에 나타나 있으며 米廩, 夏序, 瞽宗, 頖宮 등의 명칭이 <明堂位>에 나타나 있다. 요컨대 모든 학교 가운데 가장 존귀하고 가장 큰 것을 太學이라 불렀다. 마치 여러 廟 중에서 가장 존귀한 것을 大廟라 하고 여러 사직중에 가장 존귀한 것을 大社라 한 것과 같은 것이다. - <祭法>에 나와 있다. 大廟, 大社의 ‘大’를 ‘태’라고 읽는데 유독 大學을 ‘대’로 읽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太學에서 이 책으로 사람을 가르치기 때문에 이름을 大學이라 한 것이다.

 

가령 <大學>의 이름을 《禮記》의 <玉藻>나 <檀弓>처럼 머리의 두 글자를 따서 지었다하더라도 ‘태학’이라 읽어야 할 것인데, 하물며 내용 모두가 太學에서 사람을 가르치는 법인데도 어찌 또 이를 ‘대’라고 읽어야 할 것인가.

 

예전에 사람을 가르치던 법에 비록 ‘교육에 차별은 없다’고 하였지만 王公이나 大夫의 아들은 중히 여기고 먼저 가르쳤으니 《書經》의 <堯典>에 典樂이 가르친 사람들은 맏아들뿐이었다고 한다. 맏아들은 太子를 뜻하는 것이다. 天子의 아들만은 맏아들인지 아닌지 상관없이 모두 가르쳤지만 三公과 諸侯 이하는 맏아들로서 세대를 이어받을만한 자만이 太學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王制>와 《書經》에 나타나있다. 《周禮》에도 大司樂이 國子를 가르치고 樂師가 國子를 가르치고 師氏가 國子를 가르치고 保氏가 國子를 양육한다고 하였다. 國子라 칭한 자는 모두 <堯典>에서 말하는 제왕과 귀족의 맏아들이지 일반 서민의 뭇 자제들까지는 아니었다.

天子의 太子는 장차 세대를 이어 天子가 될 것이고 天子의 여러 아들은 諸侯로 봉해질 것이고 - 비록 諸侯가 되지 않더라도 封邑을 받는다. 諸侯의 큰 아들은 또 諸侯가 될 것이고 公卿大夫의 큰 아들도 다음 세대에 公卿大夫가 될 것이니 이는 모두 언젠가 나라나 집안을 이끌어 나가며 천하에 군림하기도 하고 天子를 보필하기도 할 것이며 백성을 지도하면서 태평성대를 이룰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太學에 들어가게 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이 ‘大學의 길은 밝은 인격을 밝힘에 있고, 親民하는데 있다’고 하는 것이다. 낮은 집안과 계급은 옛날 법에 司徒에 속해 있었고 太學과는 관계가 없었다. 그래서 두 등급으로 나뉘어져 뒤섞이지 않았다. 그것이 《堯典》에서 契은 司徒가 되어 백성을 가르치고 夔는 典樂이 되어 맏아들을 가르쳤으며 《周禮》에서는 大司徒가 鄕三物로 만민을 가르치고 大司樂이 三敎로 귀족의 자제들을 가르치게 하였으니 - 三敎란 樂德, 樂語, 樂舞 모두 뚜렷하게 두 등급으로 나뉘어 있던 것이 분명하고 가르치는 방법도 公私와 大小가 확실히 구분되어 있었다. 이처럼 <大學>에서 ‘大學之道’란 ‘맏아들의 길’을 가리킨 것이지 ‘만백성의 길’을 가리킨 것은 아니었으니 ‘向學之道’라 한 것은 잘못이다.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것은 이 經이 주장하는 중심사상이다. 자신을 가다듬고 가정을 정제하는 것은 그 근본을 더듬어 올라가 말한 것이고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것도 근본의 근본을 거슬러 올라감을 말한 것이다. 오직 중심사상은 나라를 다스리며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하게 한다는 두 절은 상세하게 다루고 그 위에 나온 몇 절은 대강 제시해 놓은 것이다.

요즘은 작위도 대를 이어 물려받지 않고 재능도 집안에 의해 선임되지 않으므로 재능만 있으면 낮은 집안이라도 벼슬에 올라 군왕을 도우며 만민을 다스릴 수 있다. 宋의 유학자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옛 제도에 익숙하지 못해 太學을 만민이 배울 수 있는 곳으로 여기고 ‘大學之道’를 만민이 따라야 할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大學’ 두 글자만 보고서 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하게 한다’는 것이 반드시 太學에서만하는 가르침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것을 ‘大人之道’로 고쳐 세상 사람이 두루 배울 수 있는 것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옛날의 太學에는 입학자격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서민의 자제들은 아무리 결혼하고 어른이 되었다 해도 들어가기 쉽지 않았다.

 

<증거>

《周禮》에서 大司樂은 成均의 법을 파악하고 학교행정을 관장했는데, 나라의 자제들을 한데 모아놓고 - 董仲舒는 ‘成均은 五帝의 학교’라 했다. 대체로 道와 德 이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을 가르치게 했다. 樂德으로써 귀족의 자제들에게 中,和,祗,庸,孝,友를 가르쳤고 - 鄭玄은 ‘부모를 좋게 하는 것이 효도, 형제를 좋게 하는 것을 우애라 한다’고 했다. 樂語로써 귀족의 자제들에게 道를 일깨우며 시를 외우게 하며 언어를 가르쳤고 - 곧 좋은 말을 듣고자 하며 말이 일치하도록 하는 것이다. 음악과 춤으로 國子들에게 雲門, 大卷, 大咸, 大磬,大夏,大濩,大武를 춤추도록 가르쳤다.

 

樂師는 國學을 다루는 정책을 관장하고 귀족 자제들에게 小人의 무용을 가르쳤다. - 註에 <內則>에 13세에는 勺을 추고 크면 象을 추고 20세에는 大夏를 춘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여기서 國子라 한 것은 《堯典》에서 말한 胄子다.

 

<증거>

《周禮》에서 地官 師氏는 三德으로 귀족의 자제들을 가르쳤는데 첫째는 至德(道의 근본), 둘째는 敏德(行의 근본), 셋째는 孝德(거스르는 것이 잘못임을 안다). 이다. 또 三行을 가르쳤는데, 첫째는 孝行 (부모를 사랑함), 둘째는 友行(본받을 사람을 존경함), 셋째는 順行(스승과 어른을 섬김)이다. 대체로 벼슬 없는 귀족의 자제들이 거기서 배웠다(鄭玄이 王公의 자제로서 놀면서 벼슬자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保氏는 道로 귀족 자제들을 교육하되 六藝인 禮, 樂, 射, 御, 書, 數와 六儀인 제사지내기, 손님대하기, 조정에서의 태도, 상례를 치르는 태도, 군대에서의 생활, 수레나 말 모든 법을 가르쳤다.

 

내 생각에 벼슬 없는 자제들에 대한 鄭玄의 주와 杜子春의 설이 다르고 賈公彦의 글에서 卿大夫의 큰아들이라 하였지만 모두 잘못된 것이다. 《周禮》의 <夏官>에서 모든 卿大夫의 서자들을 벼슬이 없는 游倅(작은아들)이라 하였다. 師氏의 직책은 본래 適者를 가르치는 것이었지만 배움에 뜻이 있는 庶子들까지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를 종합하면 《周禮》의 <大司樂>에서 말한 道가 있고 德이 있는 사람은 師氏와 保氏를 가르킨 것이다. 이들의 직분은 귀족의 자제들을 가르치는 것이었지 만민을 가르치는 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증거>

《周禮》에서 夏官은 ‘諸子’ 절에서 倅(倅는 副(둘째)다. 公卿大夫의 아들이다)을 맡아서 가르치고 다스리는 일을 하고 있다(德을 닦고 道를 배우는 것). 대개 游倅의 자리에 머물게 하고 춤추는 위치를 바르게 하며 인격을 닦고 진리를 배우게 하는 것이다. 봄에는 모든 학교를 하나로 합치고 가을에는 활 쏘는 곳을 하나로 합쳐 그들의 재주를 평가하고 벼슬을 내리거나 물러나게 하였다.

 

《周禮》에서 春官, 大胥는 학사들의 장부를 관장하고 모든 자제들을 모은다. 봄에는 학사에 들어가 合舞를 맡게 하고 가을에는 合聲을 배우게 했다.

 

《周禮》에서 小胥는 학사들의 징집을 관장하고 그들을 비교하며 결석, 지각한 사람은 罰酒를 마시게 했다.

 

《禮記》 <燕義>에는 주나라 天子의 벼슬에는 庶子의 관직이 있었는데, 이 관직은 諸侯, 卿大夫士의 여러 아들 중 倅(‘쉬’로 읽는다)을 맡아 그들을 가르치고 다스리는 일을 했다.

 

내가 보기에 國倅, 游倅는 卿大夫의 여러 아들들이다. 그들에 관한 정치적 명령은 夏官에 관리하고 그들의 장부는 大胥가 관리하고 그들의 징벌은 小胥가 관리했다. 그들의 학문은 師氏에게서 배우는 까닭에 <師氏> 절의 끝에서 ‘대체로 그 나라 貴遊들이 배운다’고 한 것이다. 貴遊란 벼슬하지 않는 귀족의 자제들이다. 師氏의 직책이 맏아들을 주로 주관하지만 다른 여러 아들 또한 거기에 끼여 배울 수 있었다.

 

<증거>

《周禮》 <地官>의 大司徒는 鄕三物로써 만민을 가르쳐 그들 중 어진 사람을 천거하여 손님으로 예우하였으니 첫째는 六德(知仁聖義忠和), 둘째는 六行(孝友睦婣任恤), 셋째는 六藝(禮樂射御書數)다. 마을은 여덟 가지 형벌로 만민을 바로잡았으니 첫째 ‘불효’, 둘째 ‘화목하지 않음’, 셋째 ‘친화하지 않음’, 넷째 ‘우애하지 않음’에 대한 형벌이다.

 

鄕大夫는 司徒에게서 가르치는 법을 받아 다시 그것을 다시 鄕吏에게 나누어 준다. 鄕吏는 각각 그들이 다스리는 곳에서 그것을 가르치고 만민의 인격과 행실을 높이고 도덕과 학문, 예능을 살핀다(3년에 한 번씩 크게 시험을 보았다. 백성들의 덕행과 도예를 살펴 賢子나 유능한 사람을 뽑았다. 鄕老 및 鄕大夫들은 그들의 이속과 무리를 거느리고 예로써 그들에게 순종하였다).

 

州長은 州民을 모아놓고 나라의 법을 읽어주고 그들의 인격과 행실 및 학문과 예능을 도왔다.

 

黨正은 그 해 정월에 백성들을 모아 놓고 나라의 법을 읽게 하고 그들의 인격과 행실 및 학문과 예능을 기록하였다.

 

族師는 매달 초하루가 되면 백성들을 모아놓고 나라의 법을 읽게 하고 그들 중에서 孝, 友, 睦, 婣에 대해 배운 것이 있는 사람들을 기록한다.

 

내가 보기에 앞에서는 귀족의 자제들을 가르치고 뒤에서는 만민을 가르친다고 하였는데, 여덟 팔(八)자처럼 쪼개어 두 종류로 나눈다면 經에서 ‘大學之道’라 한 것은 맏아들을 가르치는 길이므로 벼슬아치나 만민의 경우와는 다른 것이다. 요즘세상의 법은 가족의 혈통에 귀천이 없으니 이 經에서 힘을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

 

<증거>

《禮記》의 <學記>에서 家에는 塾(글방)이 있고 黨에는 庠이 있고 州에는 序가 있고 나라에는 學이 있다고 하였다.

 

孟子는 庠, 序, 學校를 세워 그들을 가르쳤는데 庠이란 기르는 것이요 校란 가르치는 것이요, 序란 활 쏘는 것이다. 夏나라 때는 校라 했고 殷나라 때는 序라 했고 周나라 때는 庠이라 했다. 學은 이 夏殷周 三代가 함께 했는데 人倫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인륜이 위에서 밝혀지면 백성들은 아래에서 친애하게 된다(또 庠., 序에서 신중히 가르치며 孝, 弟의 대의를 거듭 실행하면 머리 흰 늙은이가 봇짐을 지고 길거리를 헤매는 일은 없을 것이라 했다).

 

내 생각에 鄕黨州族에는 다 學舍가 있어 거기서 만민을 가르쳤으니 이것은 大司徒가 관장하는 것이다. 맑고 깨끗한 곳에 太學이 있었는데, 이를 일러 國學이라 하고 귀족의 맏아들을 가르쳤으니 大司樂이 관장했다.

春秋時代에도 이 법이 있었다. 그러므로 鄭나라 子産은 鄕校를 헐지 않았으며 <王制>에서 말한 左鄕, 右鄕이라 한 것은 모두 이 鄕校의 이름이다. 《周禮》의 <考工記>에서 장인이 나라를 경영하는 법은 나라를 9구역으로 나누어 중앙에 왕궁을 놓고 전면에는 조정, 후면에는 시장 좌, 우 3鄕이 둘씩 서로 마주 향해 있고 州나 黨은 다시 鄕에서 잘게 쪼갠 것들이다.

 

<증거>

《周禮》 <地官>에서 司諫은 모든 백성의 德을 살펴 때로 그들의 인격과 행실 및 학문과 예능을 기록하고 그들의 능력을 분별하여 국사를 맡을 수 있는 사람은 鄕吏가 어떻게 다스리는지를 살펴보게 하였다.

 

《周禮》의 司救는 만민의 잘못과 과실을 관장했다. 대체로 백성이 잘못을 저지르면 세 번 꾸짖고 용서 한 뒤 처벌하며 세 번 처벌받은 선비에게는 돌(嘉石)에서 부끄러움을 깨닫게 하고 司空으로 하여금 노역을 시키도록 했다. 또는 세 번 꾸짖고 용서한 뒤 세 번 처벌당하면 감옥에 넣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 周官의 법에 師氏, 保氏로 하여금 귀족 자제들을 가르치게 하고 司諫, 司救를 시켜 백성을 가르치게 한 것이다. 이 둘은 여덟 팔(八)자처럼 쪼개져 분명하게 구별되었다. 네 직책이 잇따라 열거된 것은 그들의 직책은 다르나 하는 일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증거>

《禮記》의 <王制>에서 樂正은 四術(詩書禮樂)을 숭상하고 四敎를 수립한다. 先王의 詩書禮樂에 따라 선비를 교육하였는데 봄, 가을에는 禮樂을 가르치고 여름, 겨울에는 詩書를 가르쳤다. 太子, 王子, 여러 諸侯들의 太子, 卿大夫士의 큰 아들, 그 나라에서 재주가 뛰어나 뽑힌 사람들이 모두 배우게 된다. 대체로 입학은 나이로 정하였다.

 

내가 보기에 《禮記》의 <王制>는 한나라 文帝때 박사들이 기록한 것이다. 한나라 학자들은 옛 것과 새 것을 참착하여 한나라 법을 제정했다. 그 법에는 夔와 契을 한사람으로 합하기도 하고 大司樂, 大司徒를 합하여 한 官司로 했기 때문에 虞나라 법이나 周나라 법과는 아주 다르다. 학자들이 <王制>만을 가지고 先王의 법인 것처럼 한다면 이것은 진실과 크게 어긋난다. <王制>에서는 司徒가 주축이 돼서 鄕에서 뛰어난 선비들을 골라 司徒로 올려 選士라 하였으며 司徒에서 또 太學으로 올려 俊士라 했다. 俊士는 王子 및 公卿大夫의 맏아들과 함께 太學에서 수학했다.

朱子는 오로지 <王制>만을 근거 삼아 서문을 지었고 최근의 학자들도 先王의 법이 그런 줄 알았던 까닭에 大學之道가 드디어 백성을 가르치는 법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옛날에 대체로 백성들 중에서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司徒가 천거하여 賢能이라 했고 그를 예우하여 賓興이라 하였다. 천거하여 손님으로 예우했다 함은 鄕大夫가 주인이 되고 賢能이 손님이 되기 때문이다. 대개 黨學, 州學으로부터 司徒로 올라 오게 되니 이를 손님으로 대접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를 종합하면 옛날 太學은 본래 백성이 배우던 곳은 아니다. <王制>는 옛 법이 아니니 반드시 《書經》의 <堯典>이나 <周禮>를 가지고 그 제도를 자세히 고찰한 후에야 大學之道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증거>

<王制>에 “小學은 궁의 남쪽 왼 편에 있고 太學은 교외에 있다”고 했다.

 

《書經》에는 公卿의 太子, 元士의 맏아들은 나이 13세에 비로소 소학에 들어가 小節을 배우고 小義를 실천하며 20세가 되면 太學에 들어가 大節과 大義를 배운다.

 

《書經》을 보면 大夫의 나이 70이 되어 벼슬을 그만두면 그의 마을에서 선생님이 된다. 밭갈이하던 연장을 거둔 후 농사가 끝나면 남은 아이들은 모두 입학한다. 15세에 비로소 小學에 들어가 小節을 배우고 小義를 실천한다. 18세에 太學에 들어가 大節을 배우고 大義를 실천한다. 동지가 지난 후 4-5일 후 학교에서 나와 농사를 지낸다.

 

《大戴禮》 <保傳>을 보면 “옛날에는 8세에 집을 나와 外舍로 가서 小藝를 배우고 小節을 실천한다. 나이가 들면 太學에 나가 大藝를 배우고 大節을 실천한”고 하였다.

 

賈誼의 <新書>에는 《容經》(容經은 儀禮로 옛날에는 容臺禮라 했다)을 인용하여 “9세에 小學에 들어가 小節을 실천하며 小道를 배운다. 15세에 太學에 들어가 大節을 실천하며 大道를 배운다”고 써 있다.

 

《白虎通》에는 “8세에 이를 갈면, 小學에 들어가 글과 셈을 배우고 15세에 太學에 들어가니 이것은 太子의 藝”라고 하였다.

 

내가 보기에 小藝란 글씨와 셈이다. 小道란 曲禮와 小儀 같은 것이다. 물 뿌리고 청소하며 손님을 응대하고 나가고 들어오는 것과 같은 절차는 집에 있을 때엔 아버지를 섬기고 입학하면 선생님을 섬기면서 자기의 직분을 지키면 되는 것이다.藝라 해도 안 되고 業이라 해도 안 되고 道라 해도 안 되는 것이다. 이 일은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만난 후에 전문적으로 배워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禮樂射御와 같은 것은 8세의 어린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종합하면 大學과 小學의 구별은 道藝의 크고 작음, 학교의 크고 작음, 나이의 많고 적음을 물을 것이 아니다. 小學이 어린이의 학교가 아닌데 大學이 어떻게 어른의 학교겠는가.

 

내가 보기에 《書經》에서 餘子(餘子나 諸子 모두 卿大夫의 여러 아들을 가리킨 것이니 같아야 할 것인데 같지가 않다)라 한 것은 《周禮》의 ‘諸子’ 절의 글과 다르니 믿을 수 없다. 옛날에 선비나 농부는 다른 계급에 속한 백성이었다. 봄에는 밭을 갈고 가을에는 글공부를 하였으니 벼슬에 나갈 수 있었다. 烝我髦士란 이들을 말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그들이 小學에 들어가기에는 맏아들보다는 조금 늦고 太學에 들어가기에는 맏아들보다 조금 이르다는데 이건 또 무슨 뜻인가.

 

이를 종합해보면 卿大夫의 여러 아들은 夏官에 소속되어 師氏에게서 배우는 것이니 《書經》은 이를 잘 못 전해들은 것이다(<左傳>에 宣王 3년 晉成公이 즉위하자 卿들의 큰아들들에게 벼슬을 주고 남은 아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杜預는 “餘子란 맏아들의 친동생이다”라고 했다.

 

 

 

在明明德

 

明이란 빛내어 나타나게 하는 것이고 明德이란 孝, 弟, 慈이다.

 

《周禮》에서 大司樂은 6가지 덕목으로 귀족의 자제들을 가르쳤는데 中, 和, 祗, 庸, 孝, 友라 하였다. 中和祗庸이란 <中庸>에서 가르치는 것이고 孝友란 <大學>에서 가르치는 것이다. 太學이란 大司樂이 왕의 맏아들을 가르치는 곳인데 과목은 孝와 友를 德으로 삼았던 것이니 經에서 明德이라 한 것과 어찌 뜻이 다르겠는가.

孟子는 옛날 3代에 걸쳐 太學이 있었는데 人倫을 밝히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했다. 人倫을 밝히는 것은 효도와 우애를 밝히는 것이다. 원래 옛날 어진 왕들이 사람을 가르치던 법에는 3가지 큰 항목이 있다. 첫째는 德이요, 둘째는 行이요, 셋째는 藝이다. 大司徒가 鄕三物에서 열거한 六德, 六行, 六藝는 세부항목이다. 大司樂이 제왕의 맏아들을 가르치던 것도 이 세 가지뿐이다. 그는 忠和를 德으로 삼았고 孝와 友를 행실로 삼았다. 大司樂이 통틀어 이를 德이라 한 것은 둘을 함께 묶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詩, 書, 禮, 樂, 絃誦, 춤, 射, 御, 書, 數는 모두 藝이다. 이렇게 배우고 익히는 것이 모두 藝에 있다하더라도 그 근본 교육은 孝와 友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明德이란 곧 孝와 友이다.

虛靈不昧가 性情을 통괄하는 것을 理라 하기도 하고 氣라 하기도 하고, 明이라 하기도 하고 昏하고도 하다는 학설을 군자들이 무시하진 않지만 결코 太學에서 사람을 가르치던 과목은 아니다. 誠意니 正心이니 하는 것 역시 孝와 友를 실천하는 미묘한 이치요 방법이 될 따름이지 과목은 아니다. 교육하던 과목은 孝, 弟, 慈 이 세가지일뿐이다.

《書經》의 <堯典>에서는 ‘삼가 五典을 빛낸다’고 하였고 ‘五敎를 편다’고 하였는데 五典과 五敎란 아비는 바르고, 어머니는 자애롭고, 형은 우애롭고 아우는 공손하고 자식은 효도하는 것이다.

《春秋傳》에 史克의 말도 이와 같이 명백하다. 형은 우애하고 동생은 공손하다는 것을 합하면 弟요, 아비는 바르고 어머니는 자애롭다를 합하면 慈이다. 그러므로 孝, 弟, 慈 이 세 글자는 五敎를 총괄한 것이다. 太學에서 맏아들을 가르치고 그들이 백성을 보살피는데 있어 이 세 글자 외에 또 다른 것이 있겠는가.

 

《書經》의 <堯典>에서 “큰 덕을 밝히어 친척을 화목하게 하고 백성들을 다스리고 여러 나라를 화평하게 하셨다.” 하였는데, 이는 곧 經에서 말한 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말 한 것이다. 堯임금은 孝, 弟, 慈를 밝히려 노력하셨으므로 집안이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져 마침내 온 세상이 태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堯임금이 虛靈不昧로 德을 밝혀 여러 친족들이 화목하게 되었다” 한다면 옳지 않은 것이다.

《書經》의 <康誥>에서 경계하였던 것도 오직 不孝와 不弟였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효도하지 않거나 아우가 형을 공경하지 않거나 아비가 자식을 자애롭게 기르지 않으면 이를 징계하고 처벌하여 “文王이 인격을 밝혀 小子는 새로운 백성이 되었다” 했으니 明德은 孝, 弟, 慈인 것이요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것도 孝, 弟, 慈인 것이다. 널리 다른 책에서 인용할 필요 없이 이 책에서 인용한 것도 다 이와 같다. 經에 이르길 “옛날에 明德을 천하에 밝히고자 하는 사람은 그 나라를 먼저 다스린다.” 하였으니 옛글에서 인용한 것과 대조해보면 明明德의 전체 해석은 당연히 治國平天下 절에서 찾아야 한다. 心性昏明은 절대 明德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다만 그 윗 절에서 “孝란 임금을 섬기는 이유가 되는 것이고 弟란 어른을 섬기는 이유가 되는 것이며 慈란 대중을 통솔하는 방법”이라 하였고 아래 절에서 “위에서 노인을 노인으로 섬겨야 백성들이 孝를 일으키고 위에서 어른을 어른으로 섬겨야 백성들이 弟를 일으키고 위에서 고아를 돌봐 주어야 백성이 배반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두절에서 주장하는 것은 다 孝, 弟, 慈 세 글자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明明德의 올바른 해석이다.

 

<考訂 - 상세히 고찰하여 바로 잡음>

鄭玄의 주에 明明德은 “지극한 덕을 밝히는 데 있다”고 말했다.

 

孔穎達의 註疏에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밝은 덕을 다시 들어내어 나타나게 하는 것”이라 말했다.

 

내가 보기에 《孝經》의 첫 장에 “옛날 어진 왕들은 至德과 要道로 천하를 따르게 하였다”고 했으며 《孝經》에서 “道는 德의 근본이다”라 하였고 鄭玄이 밝은 덕을 至德이라 했으니 至德이란 孝와 弟이다.

 

또 나는 孔穎達의 해석이 옛날 사람들의 뜻에 어긋나지 않았다하더라도 뒷날의 폐단을 조금이나마 터놓았다고 본다. 마음속에는 본래 德이란 없는 것이요 오직 본성만이 있는 것이니 ‘내가 지닌 곧은 마음씨대로 행할 수 있는 것’을 德(德이란 글자도 行, 直, 心는으로 되어 있다)이라 하는 것이다. 善을 행한 후에 德이란 이름이 성립되는 것인데 실행하기도 전에 자신이 어떻게 明德을 가질 수 있는가.

 

<考訂>

盧玉溪의 孝孫(원나라 때 유학자다)은 “孝, 弟, 慈 셋은 明德의 목적”이라고 하였다(徐奮鵬의 <道脈敦流>를 보라).

 

劉元卿의 <大學略疏>에서 “군자는 孝와 德을 밝혀 노인을 노인으로 섬기고 弟의 德을 밝혀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고 慈의 德을 밝혀 고아를 불쌍히 여긴다”고 하였다(<性理大全會通>을 보라).

 

내가 보기에 옛날 학자들도 일찍이 孝와 弟가 明德임을 알고 있었는데 과거시험에서 이런 해석을 용납하지 않아 말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또 내가 보기에 劉元卿의 다른 설에서 “明德이란 나의 본마음이니, 원래 천하와 함께 한 몸”이라 하였고 “본래 明德을 至德이라 말한다” 하였으니 이 두 문장의 말은 분명 한 사람이 한 것은 아닐 것이다. 혹 동명이인이거나 한사람이라면 신념이 굳지 못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考訂>

來知德은 <心學晦明解略>에서 王陽明이 <大學>에 錯簡은 없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옳다. 그러나 格物의 物을 事로 인정하여 사람을 가르치면서 생각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알게 되는 힘(良知)에 앞서는 것이라 하였다. 明德 두 자 또한 朱子의 해석에 의거하였고 다소 해석에도 잘못이 없지 않다. 하늘이 총명함을 王陽明에게만 다 주지 않았도다(<性理會通>을 보라).

 

내가 보기에 來知德의 학설에서 孝와 弟를 明德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 전문을 보지 못했다. 전에 <瞿塘集>을 구해보려 했으나 얻지 못했다.

 

최근에 夏軒 尹鑴는 孝와 弟를 明德으로 여겼는데 東園은 이를 자주 칭찬하였다.

 

<記事>

乾隆 신해 년에 달마다 보는 내각시험에서 정조께서 친히 <大學>에서 문제를 내셨다. 나는 “신하가 망령되지만 조용히 생각해보니 <大學>의 극치나 실용은 孝, 弟, 慈의 세 가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大學>의 요지를 밝히자면 먼저 孝, 弟, 慈의 뜻을 뚜렷이 드러내 보인 후에야 전체의 쓰임새를 알 수 있습니다. 經에서 말하길 ‘明德을 천하에 밝힌다’고 하였으니 明德을 밝힌다면 귀착될 곳은 반드시 平天下의 한 절에 있을 것입니다. 孝를 일깨우며 弟 일깨우는 법과 고아를 돌보아 배반당하지 않도록 교화하는 것이 明德을 밝히는 진면목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답하여 1등으로 합격했다. 그 때 蔡樊菴이 심사위원 이었는데 내가 말한 明德의 뜻이 <朱子章句>와 어긋난다고 하여 2위로 떨어트리고 金羲淳을 1위로 올렸다. 이것이 어느덧 24년 전의 일이다.

 

<答亂 - 논란에 대답함>

어느 사람이 내게 물었다. “원래 <大學>에는 綱이 있고 目이 있는데, 意, 心, 身은 德의 조목이고 家, 國, 天下는 民의 조목이다. 옛날 임금들이 意, 心, 身 德을 밝히는 것을 明德을 밝힌다고 하였고 집안, 나라,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을 新民이라 한 것인데, 孝, 弟, 慈를 明德으로 여겨도 되겠는가.”

 

對答

意, 心, 身이란 善惡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들인데 어떻게 德이라 할 수 있는가? 德이라 해도 오히려 바르지 않다고 할 것인데 어떻게 바로 ‘明德’이 하겠는가. 만약 意, 心, 身도 德이 아니고 誠意, 正心, 修身도 德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잘못이라면 이것은 大學之道는 德에 있다고 하는 것은 옳지만 明德에 있다는 것은 옳지 않고 明德에 있다고는 할 수 있지만 明明德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 바르게 하고 닦는 것보다 한 층 더 노력이 있은 후에야 明明德이라 해야 옳은 것이니 意, 心, 身은 德이 분명하지 않은가? 誠意, 正心, 修身은 明明德이 아님은 분명하지 않은가?

新民 두 글자도 백성을 위주로 말 한 것이니 ‘집안이 백성 중에 있다’고 하는 것이 잘못임을 말한 것이다. 부모형제를 백성이라 해도 좋단 말인가.

《詩經》의 <堯典>에서 德을 밝혀 친족을 화목하게 하고 백성을 밝게 다스렸다 했으니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백성을 밝게 다스리는 것이다. 친척을 화목하게 한다는 것도 오히려 다른 말인데 하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끼리 우애가 깊은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백성을 새롭게 하였다’고 해도 좋단 말인가.

1綱3目을 하늘이 마련하고 땅이 정해준 것처럼 인정하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다. 誠意니 正心이니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쌓는 공적인데 어떻게 이것을 明德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불교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법은 마음의 다스림을 사업으로 여기지만 유교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법은 사업을 마음 다스리는 것으로 여기니 誠意, 正心이 비록 배우는 사람들의 지극한 공부이기는 하지만 매일 事 때문에 성의를 다하고 事 때문에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지 禪家에서처럼 벽을 향하고 앉아서 마음을 들여다보며 스스로 虛靈한 本體를 검사하고 허공처럼 밝아서 티끌 하나 섞이지 않는 것을 ‘誠意正心’이라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기 아버지에게 효도하고자 하는 사람은 한 번 방안이 따뜻한가를 살피더라도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 한 번 의복이 시원한가를 살피더라도 정성을 다하고 한 가지 맛있는 음식을 갖다 드리더라도 정성을 다하고 의복을 세탁해 드리더라도 정성을 다하고 술과 고기로 손님을 접대하더라도 정성을 다하고 부모의 잘못을 조심스럽게 말씀드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으시도록 해드리더라도 정성을 다하니 이것을 誠意라 한다.

웃어른에게 공경을 다하고자 하는 사람은 한 번 부름에 나가더라도 정성을 다하고 한 번 물음에 답하더라도 정성을 다하고 한 번의 노역에 복무하더라도 정성을 다하고 한 번 앉은 자리나 짚는 단장을 만들어 드리더라도 정성을 다하고 술과 음식을 차려드리더라도 정성을 다하고 학업을 닦더라도 정성을 다하니 이것을 誠意라 한다.

이것으로 임금을 섬기고 이렇게 벗과 사귀며 이로써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이니 성의를 다 하는 이유는 모두 일을 실행 하는 가운데 있다. 단지 뜻만 가지고 있는 것은 誠이라 할 수 없고 다만 마음에만 가지고 있는 것을 正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經에서 ‘小人이 한가히 있을 때는 못 된 짓을 무엇이나 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한 것은 악한 짓을 행한다는 것이다. 한가히 있을 때에는 못 된 짓을 행하다가 사람을 만나면 선한 체 꾸며대는 것은 뜻을 성실히 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한가할 때도 선을 행하고 사람을 만나도 선을 행한다면 뜻을 성실히 한 사람이니 정성을 다하려는 공부가 어찌 일을 행할 때 없을 수 있겠는가.

요즘 사람들은 마음 다스리는 것을 誠意로 여겨 바로 虛靈이 되고 어둡지 않은 본체를 잡아 뱃속에 넣어둔 채 돌이켜 그것의 진실 되고 망령됨이 없는 이치를 살려보려 한다. 모름지기 평생을 가만히 앉아서 말없이 자기 뱃속을 관찰한다면 멋진 모습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게 坐禪이 아니고 무엇인가.

요새는 마음 다스리는 것을 正心으로 잘못 알고 망아지 같은 마음을 억누르며 그것이 드나드는 것을 살피기도 하고 잡았다가 놓쳤거나 간직했다가 잃거나 하는 이치를 시험하기도 한다. 이런 공부도 본래 우리가 해야 할 임무이긴 하지만 이런 것은 새벽이나 저녁이 되어 일 없을 무렵에 하나씩 간추리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옛사람들이 正心이라 말한 것은 사물을 접할 때 있었지 고요할 때 말없이 웅크리고 있을 때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周易에서 ‘敬은 곧장 안으로 義는 밖으로’라 하였으니 사물을 접한 후에야 敬의 명칭이 생기는 것이고 일을 처리한 후에야 義의 명칭이 성립되는 것이다. 사물에 접하지 않고선 敬과 義가 생기지 않는다.

이를 종합하면 교육의 과목을 정하고 법도를 펴는데 있어 조목을 열거할 때 孝와 弟는 있지만 誠意와 正心은 있을 수 없으며 睦, 婣은 있을 수 있지만 格物, 致知는 있을 수 없다. 格物, 致知, 誠意, 正心이란 것은 孝, 弟, 睦, 婣을 실행하는 묘한 이치이자 방법이지 이것으로써 법도의 조목을 삼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周禮》에 敎條니 法條니 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經에서 말하는 格物, 致知, 誠意, 正心은 聖人의 문하에서 내려오는 비결이다. 그 중 太學의 條例에서 綱은 明德이라 하고 目은 孝, 弟, 慈이다. 意, 心, 身을 어떻게 明德이라 할 수 있으며 誠意, 正心, 修身을 어떻게 明明德이라 할 수 있는가. 사심을 버리고 공정하게 바라본다면 저절로 깨닫게 될 것이다.

 

<答亂>

누가 “마음의 본체는 공허하나 기능은 밝은 까닭에 이를 明德이라 하고 때에 따라 어두워지지만 사람이 다시 이를 밝히는 까닭에 明明德이라 한다. 孝, 弟는 그 생김새가 본래 밝거나 비어있지 않은 것이니 明德이라 할 수 없고 때에 따라 어두워지거나 다시 밝아지는 일도 없으니 明明德이라 할 수도 없다.” 그렇지 않은가?라고 물었다.

 

<對答>

《詩經》에 ‘나는 明德을 품었노라’ 했고 《周易》에서는 ‘스스로 明德을 빛내다’라고 했고 《周書》에서는 ‘明德만이 오직 향기롭다’고 하고 《春秋傳》에서는 ‘明德이 있는 이를 골라 세워 주나라의 울타리가 되게 하다’라고 하였고 魯公에게 수레와 깃발을 나누어 주고 ‘周公의 明德을 빛나게 한다’고 하였다. 이것들이 모두 다 마음의 본체를 이른 것일까? 대체로 德行이 神明과 통한 것을 일러 明德이라 하는 것이다. 신에게 제사 지내는 물을 明水라 하고 하늘에 제사지내는 방을 明堂이라 하는 것처럼 孝와 弟의 德을 실천하면 神明과 통하는 까닭에 이를 明德이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본체는 공허하나 기능은 밝은 마음만이 明德이 된다는 것인가.

孟子가 庠, 序, 學, 校의 제도를 말하면서 ‘모두 人倫을 밝히는 곳’이라 하여 요즘 한 나라의 太學과 지방군현의 鄕校와 그 밖의 堂에 모두 明倫堂이란 세 글자를 걸어 놓았다. 明倫이란 孝와 弟를 밝히는 것이 아닌가? 大學之道 역시 人倫을 밝힘에 있음으로 大學之道는 明明德에 있다고 한 것이다. 삼척동자도 太學에 明倫堂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 大學之道가 人倫을 밝힘에 있음을 모르고 오히려 大學之道가 明心에 있다 하니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마음을 밝히는 일도 본래 우리들의 중요한 임무이긴 하지만 經에서 明明德이라 한 것은 마음을 밝힌다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온천하의 학교에 무엇 하러 明倫堂이라는 세 글자를 걸어놓은 것인가. 잘 생각해보길 바란다.

 

在親民

 

程子는 “親은 新으로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王陽明은 “親이 맞다”고 말했다. 明德이 孝, 弟, 慈라면 親民도 新民은 아니다. 舜임금이 契에게 “백성이 親하지 않거든 五敎를 펴도록 하라”고 명령했으니 五敎란 孝, 弟, 慈이다. 즉 舜임금이 契에게 孝, 弟, 慈의 가르침을 펴도록 하면서 ‘백성이 親하지 않거든’이란 단서를 달았으니 이것으로 孝, 弟, 慈는 親民의 근거가 된다.

孟子가 庠, 序, 學, 校의 제도를 말하면서 “學이란 人倫을 밝히는 근거다. 人倫이 위에 밝혀지면 백성이 아래서 親해진다.”고 하였으니 어떻게 다른 해석이 있겠는가. 明德을 밝히는 것은 인륜을 밝히는 것이고 親民이란 백성들끼리 친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가 학교제도를 말하면서 이와 같이 말했고 大學之道의 말도 이와 같으니 또 다른 해석이 있겠는가? 魯나라 展禽이 “契이 司徒가 되자 백성들이 화목하였다”라고 말했으니 백성이 화목하였다는 것은 백성들이 친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孔子의 “先王이 至德과 要道를 간직하고 천하를 다스리니 백성이 화목 하더라”는 말은 백성들끼리 친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또 그는 “백성에게 친애할 것을 가르치자면 孝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예법에 순종할 것을 가르치자면 弟보다 앞서는 일이 없다”고 하였으니 백성이 친애한다는 것은 백성들끼리 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사랑을 이루되 어버이로부터 시작하니 백성들에게 화목을 가르치고 공경을 이루되 어른으로부터 시작하니 백성들에게 순종할 것을 가르치라” 하였으니 백성이 화목하고 순종하는 것은 백성들끼리 친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백성을 가르치되 孝로써 한다면 백성의 아들 된 사람은 그 아버지에게 친애하고 백성을 가르치되 弟로써 한다면 백성의 아우 된 사람은 그 형에게 친애하며 백성을 가르치되 慈로써 한다면 백성의 아비 된 사람은 그 아들에게 친애하며 백성의 어른 된 사람은 어린이에게 친애할 것이다. 이러니 大學之道가 어찌 親民에 있지 않다는 말인가.

만일 盤銘, 康誥, 周雅의 글이 新民의 명백한 증거가 된다고 한다면 親과 新 두 글자는 모양도 비슷하고 뜻도 통하므로 ‘친하게 한다’는 것은 ‘새롭게 한다’는 것이 된다. 《書經》의 <金騰>에서 馬融은 親逆을 新迎이라 했고 梅賾은 ‘親은 新이다’라고 했으니 새롭다는 것은 친애한다는 것이다. 백성이 친애하면 곧 새롭게 되는 것이다. 어찌 꼭 한 획도 변함이 없어야만 문장의 앞뒤가 정확하게 맞을 수 있단 말인가. 王陽明은 明德을 孝와 弟로 여기지 않았으니 親民의 뜻에는 지극한 바가 없고 程子의 해설처럼 어린애까지 다 좋아하는 것만도 못한 것이다.

이를 종합해 보면 이 두 가지 뜻은 어느 한 쪽도 없어서는 안 되겠기에 아울러 둘 다 놓고 후일의 현자를 기다리기도 하자.

 

<引證>

孟子는 “사람마다 그 어버이를 어버이로 섬기고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면 천하는 태평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鏞案>

‘明德을 천하에 밝힌다’는 것이 親民이다. 孟子의 말 또한 親民이다. 백성들이 행한 것은 ‘밝게 비어 있어 어둡지 않은 德’이 아니다. 어버이를 어버이로 섬기는 것은 孝이고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는 것은 弟이다.

 

<答亂>

누가 意, 心, 身은 德이요 家, 國, 天下는 民이다. 親民의 뜻은 주로 백성들의 입장에서 이야기한 것이니 親民은 綱이 될 수 없고 家, 國, 天下는 目이 될 수 없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對答>

親民에 어떻게 조목이 없을 수 있겠는가. 經에 “윗사람이 늙은이를 늙은이로 섬기면 백성은 孝道를 일으킨다”고 했으니 백성들로 하여금 孝道를 일으키게 하는 것이 親民이다. 또 “윗사람이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면 백성들은 弟를 일으킨다”고 했으니 백성들로 하여금 弟를 일으키게 하는 것이 親民이다. 또 “윗사람이 고아를 불쌍히 여기면 백성들이 배반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백성들로 하여금 배반하지 않게 하는 것이 親民이다. 어떻게 親民에 조목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家란 父子와 형제가 있는 곳이다. 父子와 형제를 백성이라고 할 수 있는가?

 

<答亂>

누가 虛靈本體는 氣稟 때문에 구속을 받고 욕심 때문에 가려져 때로 어두워지게 마련이니 이를 일러 舊染이라 한다. 舊染 때문에 新民이라 하는 것이다. 舊染이 없으면 新民이라 하겠는가라고 물었다.

 

<對答>

染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악한 사람과 익숙해지면 染이 되고 악한 풍속과 익숙해져도 染이 된다. 이는 孔子가 “천성은 가깝지만 습관은 멀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어릴 때 바르게 기르면 악에 染되는 일이 없다. 8세에 小學에 들어가 물 뿌리며 소제하고 어른을 응대하는 예법과 禮, 樂, 書, 數를 익히고 공경으로 자기가 타고난 본성을 미리 길러 15세가 되어 太學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몸에 더러운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朱子가 말한 舊染이란 것은 梅氏가 《書經》의 <胤征>에서 말한 “더럽혀진 풍속을 모두 새롭게 한다”는 舊染이 아니라 기품과 욕심에 오염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최고의 지혜를 가진 사람에게도 있는 것이다.

《楞嚴經》에 “석가여래가 지닌 性은 맑고도 고요한 것이 본래의 타고난 모습”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本然之性이다. 본래 타고난 性이 새로운 기운에 의해 오염되어 참다운 본체를 잃은 것이니 이것이 《般若起信論》에서 거듭 말한 내용이다. 新薰이 오염됐다는 것은 본체는 밝고 비어있는 것이지만 새로운 기질이 씌워져 오염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新薰이 곧 舊染이 되고 舊染이 新薰이다. 본연에 근거해서 말하면 新薰이고 현재에 근거해서 말하면 舊染이다. 여기에 아무리 지극한 이치가 담겨 있다하더라도 經에서 말한 親民과 新民은 이런 뜻이 아니다. 經에서 “한 집안이 어질면 한 나라에서 그런 기풍이 일어나고 한 집안이 양보하면 한 나라에서 양보하는 기풍이 일어난다”고 하였고 “윗사람이 노인을 노인으로 섬기면 백성이 孝道이 기풍을 일으키고 윗사람이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면 백성이 弟의 기풍을 일으킨다”고 하니 일으킨다고 하는 것은 ‘진작하여 새롭게 하는 것’이다. 옛것을 버리고 새롭게 일으킨다고 해서 新民이라 하는 것이다. 굳이 虛靈本體라야만 新明할 수 있겠는가.

 

在止至善

 

止는 어디까지 이르러 더 이상 옮기지 않는 것이다. 止善은 人倫의 至德이니 진실하면 지극하다.

 

<議曰>

止於至善이라는 것은 자식이 되면 효도에 止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공경에 止하고 사람들과 사귈 때는 믿음에 止하고 아버지가 되면 자애로움에 止하고 군왕이 되어서는 어짊에 止하니 止善이란 人倫에 있는 것이다.

止至善 구절은 明德과 新民을 하나로 말했지만 노력해야 하는 것은 자신을 닦는 일이지 사람들로 하여금 止至善하도록 다스리는 데 있지 않다. 顔淵이 仁에 대하여 묻자 孔子는 “仁을 하는 것은 자기가 하는 것이지 남 때문에 하는 것이겠는가?”하고 대답했다. 임금이 되어 어짊에 止한다는 것도 오직 자신을 닦는 것이다. 堯舜이 백성들에게 억지로 권하여 止至善한 것은 아니다.

經에서 “堯舜이 仁으로 천하를 통솔했다” 하였는데 통솔했다는 것은 거느린다는 것이고 인도한다는 것이다. 堯舜은 자신이 먼저 자신을 닦은 후 백성을 거느리고 인도하였지 백성에게 강제로 명령하여 止至善 하도록 한 방법은 없다.

이를 종합해 보면 <大學>의 세 강령은 다 人倫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 그 조목이 분명하지 못한 까닭에 다음과 같은 도표를 붙인다.

 

               孝는 임금을 섬기는 것

明明德 - 弟는 어른을 섬기는 것 - 天子와 庶人이 자신을 닦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慈는 대중을 섬기는 것

 

                  노인을 노인으로 섬기면 백성이 孝를 일으킨다.

親(新)民 -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면 백성이 弟를 일으킨다. - 한 집안이 어질면 한 나라가 어짊을 일으킨다.

                  고아를 불쌍히 여겨야 백성이 배반하지 않는다. 

 

               자식이 되어서는 孝에 止하고

止至善 - 신하가 되어서는 敬에 止하고

- 백성은 盛德과 至善을 잊을 수 없다.

               사람과 사귈 때는 信에 止하고

                국왕이 되어서는 仁에 止하고

 

<答亂>

누가 “그대는 至善을 아는가. 하늘의 이치는 公에 지극하며 털끝만한 인간의 욕심도 없이 마음의 본체로 하여금 텅 비고 밝게 하여 다시 그 본연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자신을 이와 같이 하고 백성도 그렇게 되니 이를 일러 至善이라 하는 것이다. 그대는 오직 인륜적인 관계만으로 설명하려 하니 어떻게 통하겠는가?”라고 물었다.

 

<대답>

내가 말한 것은 經이지 내 말이 아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본성을 고치는 일 또한 군자의 중요한 일이긴 하나 성인의 말에는 차례가 있고 질서가 있어 서로 섞이지 않는 법이다. 때로는 《孟子》에서처럼 心性을 논하기도 하고 《中庸》에서처럼 天道를 논하기도 하고 《大學》에서처럼 德行을 논하기도 하나 각각 주장하는 바는 따로 있어 뜻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心性에 관한 논의가 아무리 고도로 미묘하고 精微하다해도 《大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무리 수준이 높아도 이 經과는 어긋난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성인의 도가 자신을 완성하고 남을 완성하는 것으로 시작과 끝으로 삼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를 완성하는 것도 자기를 닦는 것으로 하고 남을 완성하는 것도 자기를 닦는 것으로 이루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身敎라 한다. 그러므로 止於至善 구절의 완전한 해석은 ‘於緝熙敬止’ 절에 있으니 여기 열거한 다섯 개의 止는 자기 스스로를 닦는 것이지 백성을 닦는 것은 아니다. 내 자신이 먼저 마음을 다스리고 백성의 마음을 다스려 모두 止至善 함을 기약하는 것이 《大學》 어디에 나와 있는가.

만일 내 자신이 백성들과 함께 至善의 공부를 기약한다면 백성의 至善을 經에서도 언급했을 것이다. 經에서는 오직 백성들이 盛德과 至善을 잊을 수 없다고만 말했을 뿐 백성들의 至善에 대해서는 논한 바가 없다. 첫머리 止至善 구절은 자신의 수행을 주로 말한 것이기에 백성이 해야 할 것으로 열거할 필요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내가 至善에 이르면 백성은 스스로 나를 따라 至善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백성의 至善을 내가 강요할 바는 아니다. 仁을 행한다는 것이 자신이 하는 것이지 남 때문일 수 있겠는가?

이를 종합하면 誠意, 正心은 《大學》의 큰 조목이 되는 까닭에 예전 학자들이 經으로 마음과 성품을 다스리는 법으로 삼았다. 그러나 옛 성인들이 마음을 다스리고 본성을 고치는 것은 매번 일을 실천하는 속에 있었고 이 일의 실천은 人倫외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마음으로 부모를 섬기면 誠意와 正心으로 孝를 이루게 되고 진실한 마음으로 어른을 섬기면 誠意와 正心으로 弟를 이루게 되고 진실한 마음으로 어린이를 사랑하면 誠意와 正心으로 慈를 이루게 되니 誠意와 正心으로 집안을 가다듬고 誠意와 正心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誠意와 正心으로 세상을 평화롭게 할 것이다. 誠意와 正心은 매번 일을 실천하는 곳에 있으니 誠意와 正心은 인륜에 붙어 있는 것이다.

한갓 뜻만으로는 정성스러울 수 있는 이치가 없고 한갓 마음만으로는 올바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인륜인 일을 실천함을 제외하고 마음만으로 止至善 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예전 성인들의 본래 하던 방법이 아니다. 天理를 보존하고 욕심을 끊을 수 있는 시간도 사람과 사람이 접할 때 있는 것이다. 잠자코 앉아서 자신을 돌이켜 볼 때에도 반드시 나와 남이 서로 관계할 때의 일을 취하여 하나씩 점검해야 의거할 것이 생겨 성실할 수 있고 바르게 할 수 있을 텐데 아직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그 모습을 관찰한다고 하면 장차 무엇에 보탬이 될지 알 수가 없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생활하는 것이 인륜이다. 인륜에 있어 스스로 자기가 할 노릇을 다 하는 것이 곧 至善이다. 만일 인륜을 떠나 단지 그 뜻만을 취해 성실해야 될 이유를 찾거나 마음만을 가지고 올바르게 해야 할 이유를 찾는다면 너무 깊고 넓고 황홀하여 가닥을 추려 잡기가 힘들 것이니 그렇게 되면 좌선의 병에 걸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도 至善을 얻을 수는 없다. 선배들이 心學을 다듬는 초년에 마음의 병에 걸린다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성실함을 행위가 없는 뜻에서 구하거나 올바름을 物이 없는 마음에서 찾다가 그대로 마음의 병이 생겼던 예가 어디 한둘이던가. 至善이란 인륜관계에서 이루어진 德이고 誠에 이르는 곳이다. 이것 외에 至善을 어디서 찾겠는가.

 

눈에비친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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