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비트겐슈타인과 선험철학3

반응형

비트겐슈타인과 선험철학3
 

그 자신 비트겐슈타인 학자는 아니지만, 셀라스는 비트겐슈타인 후기 철학에 나타난 규범의 공간을 칸트의 선험철학과 연관시켜 <이성의 논리적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일상언어의 세계, 말행위의 세계는 바로 규범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그것은 칸트가 보여준 것처럼 개별적 판단이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가 선제해야 하는 일반적 규칙들이 지배하는 공간이며, <존재당위>의 규칙들이 작용하는 공간이다. 윤리적 당위, <행위당위>의 규칙들은 이러한 규칙들에 의존하여 비로소 명료하게 표현된다. 바로 이 점에서 셀라스는 윤리와 규범을 본체계에 한정한 칸트에 비판적이다. 윤리는, 또는 행위 규칙들은 우리의 일상 언어 속에 위치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 바로 비트겐슈타인 스스로 고백했듯이 논리의 이상성에 대한 엄격한 요구 때문이었다. 이것은 칸트에게서 과학적 지식이 절대적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엄격한 요구로부터 벗어날 때 비로소 <논리철학논고>에서 이야기하는 유아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따라서 사적 언어의 이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서 윤리적 언어란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림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에서 더 이상 이런 주장은 통용되지 않는다. 비록 윤리의 언어가 그림언어나 사실언어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더 이상 무의미하거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언어게임 속에서 충분히 명령을 지시하는 언어가 가능할 수 있고, 가치를 서술하는 언어도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 윤리적 의미를 가진다고 할 때, 그가 의미했던 윤리는 이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적 가치에 대한 것,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가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 가치에 대한 것이었으며, 바로 엄격하게 언어의 한계를 규정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언어가 가능할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에서 이러한 질문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개별적인 언어게임의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떻게 언어 전체가 가능할 수 있는지 우리는 물을 수 없다. 오히려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것은 특정한 언어게임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특정한 언어게임이 어떻게 그 나름의 규범성을 지닐 수 있는가? 그것은 규칙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이러한 규칙의 특성이 무엇이란 말인가? 도대체 우리는 규칙을 따르고 준수한다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사적 언어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규칙은 공적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규칙은 단지 해석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따라서 규칙은 규범성을 가진 채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우리는 주어진 규칙과 다른 경우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규칙의 이론적, 비경험적 필연성을 정당화되지 않는다. 우리의 자연사가 변모한다면 그것과는 다른 규칙들을 능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그 규칙은 변모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 규칙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어떤 규칙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규칙을 가정하는 경우 우리는 새로운 언어게임을 고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파생적이고 부분적인 규칙이 아니라, 근본적인 규칙의 경우 비록 그것이 이성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단지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지금 실행하고 있는 이 말행위의 양태를 해명할 수 없다. 아마도 <논리철학논고>에서 암시한 것처럼 그것이 <세상을 올바르게 보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주어진 언어규칙들은 비록 언어 전체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전체를 가능하게 하고, 그것을 제약한다. 따라서 이것으로서 우리는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마련할 수 있다. <논리철학논고>와 마찬가지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문제들은 바로 이러한 경계를 무시할 때, 달리 이야기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할 때 일어난다. 그것은 분명하지 않은 무의미를 명백한 무의미로 보여주는 작업이다. 지식, 존재, 대상, 자아에 대한 철학적, 형이상학적 이야기는 그러한 개념들이 일상 언어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결국 철학이나 형이상학은 이러한 일상 언어의 논리나 문법에 대한 오해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철학은 철학적 문제들을 해소시키는 것이다. 철학적 문제들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작용하고 있는 규범성을 무시하고 있다. 포퍼는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규범성은 비트겐슈타인이 상정했던 것처럼 그렇게 절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철학은 철학적, 지성적 문제들을 주어진 일상 언어의 규범성을 통해 해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철학적 가설과 이론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해결해야만 하는 진정한 철학적 문제들이 존재한다. 영원한 철학적 문제들이라고 할 수 있는, 즉 철학개론 서적에 언제나 등장하는 신의 문제, 마음과 육체의 문제, 자유의지와 결정론 문제, 인식의 문제 등은 우리가 지성적으로 해결해야하는 철학적 난문들이다. 과연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한 것처럼 이러한 문제들이 해소되어야 하는 사이비 문제란 말인가?


로티는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의 처방을 받아들인다. 진정한 철학적 문제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철학개론 책에 나오는 영원한 철학적 문제라는 것도 철학자들이 만들어 놓는 임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 이상 철학적인 것과 비철학적인 것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철학적 문제들이 언어의 오해에 기인한 것이므로 더 이상 순수한 철학이란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리가 의존해야 할 절대적 의미의 필연성이나 규범성이라는 개념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정당화하기 불가능하다고 해도, 또는 정당화와 부당화의 범위를 넘어서 있다고 해도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수용할 수밖에 없고 다른 도리가 없는 것, 그런 소여가 존재한다. 철학은 언어사용을 기술함으로써 이러한 소여를 보여준다. 그러한 소여는 바로 우리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를 드러낸다. 우리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철학적 질병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그것을 초월하려고 발버둥 칠 때 나타난다. 유한성을 유한성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윤리적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 혹은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왜? 그것이 바로 세상을 올바르게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