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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M. Heiddeger, 1889-1976)/Sein und Zeit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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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1. 들어가는 말

1976년 5월 26일 마르틴 하이데거가 별세하자 독일 중부지방의 유력 일간지인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Frankfurt Allgemeine Zeitung) 은 이런 기사를 내보냈다: “이 사람 마르틴 하이데거 안에 세계 철학사의 모든 지혜가 집결되어 있으며... 그가 남겨놓고 간 어마 어마한 작품은 그의 독자들을, 지금까지 어느 다른 철학 문헌이 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깊이 물음의 심연에로 휘몰아 넣을 것이다”. 파리의 세계적 일간지인 『르 몽드』(Le Monde)는 이미 하이데거의 생시에 더 높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 신문은 하이데거를 한 마디로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라고 천명했고, 이로써 그를 사르트르, 야스퍼스, 비트겐슈타인, 마르쿠제 등등의 유명한 철학자들 위에 군림시켰다.

그런가 하면 1987년 빅토르 파리아스의 책 『하이데거와 나치』가 프랑스에서 출간되어 하이데거가 철저한 나치추종자이었음을 주장하자, 프랑스 지성계에는 핵폭탄이 터진 것과 같은 회오리가 일어났다. 온 프랑스가 경악하여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듯 했고 어느 유력 일간지는 “하일 하이데거!”(Heil Heidegger!) 라는 제목아래 이 “사건”을 다룰 지경이었다.

왜? 하이데거의 무엇이 이토록 프랑스를 감탄과 경악의 상반된 감정 속으로 몰아넣었는가? 무엇이 그를 그토록 유명하게 만들었는가? 그리고 또 무엇이 그토록 프랑스 지성인들을 실망을 넘어 분노하게끔 만들었는가? 여기의 짧은 글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상세하게 다 다룰 수는 없다. 여기서는 우선 간략하게 하이데거의 삶의 여정을 살펴보고, 그의 대표작이며 20세기의 최고의 걸작품의 하나인 『존재와 시간』을 근간으로 삼아 그의 전기 사상의 대강을 윤곽지어 보기로 한다.



2. 하이데거의 삶의 여정

마르틴 하이데거는 1889년 9월 26일 바덴(Baden)주, 주민 4천 가량의 작은 마을 메스키르히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요한나 하이데거는 농부집안의 출신이고, 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하이데거는 메스키르히에 있는 바로크풍의 성 마르틴 성당의 성당지기이다. 봉급이 워낙 적어서 프리드리히 하이데거는 자주 술창고를 지키는 일을 해야만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었다.

여섯살이 되어 마르틴 하이데거는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그의 총명함을 본 마르틴의 부모는 그를 계속 공부시키고 싶어하지만 성당지기의 봉급으로는 도저히 무리임을 알고 안타까워 하였다. 고맙게도 메스키르히 본당 주임신부가 장학금을 주선하여 주어, 마르틴은 콘스탄츠에 있는 김나지움에 갈 수 있게 된다. 얼마 안 있어 마르틴은 프라이부르크에 있는 김나지움으로 옮긴다. 이렇게 재능이 있는 소년 하이데거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되는 데에는 모종의 약속이 선행하고 있었다. 즉 교회는 하이데거에게 장학금을 보장해 주어 공부를 하게끔 해주는 대신, 하이데거는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신부(神父)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그것이다. 하이데거 자신 신부가 되기를 원했다.

1903년에서 1909년까지 6년간의 김나지움과정을 마친 뒤, 하이데거는 약속대로 신부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기 위해 포알베르크(Voralberg)의 펠트키르히(Feldkirch)에 있는 예수회에 수련생으로 입회한다. 그러나 청년 하이데거는 단지 14일 동안만 예수회 수련생일 수 있었을 뿐이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하이데거는 예수회의 학자신부가 되는 꿈을 포기해야 했다. 그 후 그는 일반신부가 되기 위해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한다. 그러나 그것도 건강 때문에 용납되지 못한다. 2년간의 신학공부를 마치고 1911년 하이데거는 이제 오로지 철학에 전념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김나지움 시절에 이미 하이데거는 많은 철학책들을 즐겨 탐독하였다. 이를 안 주임신부 -- 후에 프라이부르크 교구의 주교가 된 -- 콘라드 그뢰버는 그에게 프란츠 브렌타노(Franz Brentano)의 박사학위논문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존재자의 다양한 의미에 대하여』를 선물로 준다. 결과를 놓고 볼 때, 이 책이 하이데거를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터”에 초대한 셈이 되었다. 사상적으로 처음 영향을 준 사람은 폭넓은 철학지식을 겸비한 프라이부르크대학 교의학 교수인 브라이크(C. Braig)였다. 하이데거는 그의 강의와 저서(『존재에 대하여』 1896, 『사유에 대하여』 1896, 『인식에 대하여』 1897)에 깊이 빠져 들었다. 그 다음 그는 리케르트(H. Rickert)의 신칸트주의와 후설의 『논리 연구』를 만나게 된다.

1913년 하이데거는 『심리학주의에 있어서 판단에 관한 학설』이라는 박사학위논문을 제출한다. 2년 뒤 리케르트의 지도아래 교수임용자격논문 『둔스 스코투스의 범주론과 의미론』을 완성한다. 이 논문에서 하이데거는 신칸트학파와 후설의 범주론의 도움을 받아, “일반 의미론”에 관한 중세 철학의 이념을 다시 복원시켜 보려고 시도한다.

1917년 하이데거는 프로이센 장군의 딸인 엘프리데 페트리와 결혼을 한다. 1919년 그는 사강사가 되면서 동시에, 1916년 괴팅겐에서 프라이부르크대학교로 초빙되어 온 후설의 연구조교가 된다. 하이데거는 후설이 행한 “초월론적 현상학”에로의 전환을 뒤따르지 않고 후설의 『논리 연구』의 여섯 번째 연구을 계속 거듭하여 근원적으로 해석하였다. 동시에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해석하는 데에도 현상학적 방법을 활용한다. 20년대에 들어서면서 하이데거는 그가 전수받은 가톨릭 신앙과 논쟁적인 대결을 벌린다.

1923년 겨울학기에 하이데거는 마르부르크 대학에 부교수로 초빙되어 간다. 그 당시 마르부르크 대학에서는 나토릅(P. Natorp)과 하르트만(N. Hartmann)이 강의를 주고 있었고, 곧 하이데거와 친구 사이가 된 불트만(R. Bultmann)도 있었다. 1927년 후설이 편집하고 있는 잡지 『철학 및 현상학 탐구 년보』 제 8 집의 별책부록으로 『존재와 시간』 제일부가 출간된다. 이 책으로 인하여 하이데거는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유명해진다. 사람들은 그 책에서 하나의 거대한 체계적인 연구작업이 성공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거기에서 무엇이 문제가 되고 있는지는 대체로 인식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그 작품을 키에르케고르와 야스퍼스 노선의 실존철학의 하나라고 보았고, 어떤 사람은 칸트와 피히테 식 단초의 변형으로 보기도 했다. 그 저서가 “존경과 우정으로” 헌정된 당사자인 후설은 감탄과 혐오가 교차되는 기분으로 그 작품을 받아들였다. 어쨌든 후설은 하이데거가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자기 후임이 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27년 겨울에 하이데거는 마르부르크 대학의 정교수가 되지만 1928년 겨울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초빙을 받아들여 후설의 후임으로 오게 된다.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교수취임강연을 시작으로 조용한 학문연구의 시절이 열리게된다.

그러나 평온한 탐구와 교수의 일상생활은 하이데거가 1933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의 총장으로 선출이 되어, 제삼 제국 총통의 원칙에 따라 대학교를 새로 조직하라는 임무가 부여될 때 깨지고 만다. 『독일 대학의 자기주장』이라는 총장취임강연에서 하이데거는 “지식의 임무”를 “노동의 임무”와 “방어의 임무”와의 단일성에서부터 파악할 것을 호소한다. 그리고 오직 이 지식의 임무만이 한 민족의 역사적 현존재에 “날카로움”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밖의 공적인 강연에서 하이데거는 다소 국가사회주의적으로 들리는 입장들을 대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히틀러 나치당의 극단적인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를 지지하지는 않았다. “토착(대지에 굳건히 뿌리를 내린) 민족”을 외치고 독일인 고유의 특성과 노동자들의 핵심적인 역할에의 용기를 부르짖는 국가사회주의적 운동에서 아마도 하이데거는 그가 희망해온 새로운 시작을 추정한 듯 싶다. 여기에 또한 대다수의 많은 다른 대학교수들처럼 하이데거도 전문 정치 경제적 상황분석에 대한 시각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 또한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하이데거는 당정책에 대한 이견과 바덴주 문화성과의 불화로 취임 일년 뒤인 1934년 2월 총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난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하이데거는 거의 책을 출간하지 않는다. 『존재와 시간』의 제이부도 (오늘날까지) 출간되지 않고 있다. 몇 개의 소책자만이 발간될 뿐이다. 그중 하나는 『플라톤의 진리에 대한 학설』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의 본질에 대하여』이다. 그 외에도 횔덜린의 시에 대한 해설을 발표하였다. 프랑스 연합점령군은 1945년 하이데거에게 강의를 금지시켰다. 프랑스에 있는 많은 학자들의 탄원으로 1951년 강의금지가 해제되긴 하지만, 하이데거는 한 학기 강의를 한 다음 은퇴한다. 그후에 하이데거는 몇 권의 책을 출간한다. 그중 몇몇은 30년대의 강의록들이고 몇몇은 논문과 강연집이다. 전후 하이데거는 가장 많이 인용되고 읽히는 철학자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후 새마르크스주의와 언어분석철학의 영향이 고조되자, 그의 영향력도 서서히 퇴색하기 시작한다. 1976년 5월 26일 하이데거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장례식은 그의 유언대로 그의 고향인 메스키르히에서, 그의 동향친구이며 제자인 벨테(B. Welte) 신부의 주관 하에 가톨릭 식으로 조촐하게 치루어진다. 타계하기 얼마 전부터 하이데거는 그 스스로가 구상한 80권 가량의 전집간행을 추진하여 발간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45권 가량의 전집이 발행되었다.



3.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과 기초 존재론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누구나 자명하게 알고 있다고 여기고 있고, 철학자들도 너무나 자명해서 물음의 여지마저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바로 그 “존재”(있음)의 의미에 대해서 물음을 던진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지금까지의 전 서양 철학의 역사는 “지속적으로 눈앞에 현재”하고 있는 것만이 참된 의미의 존재로 지칭될 수 있다는 주장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이렇듯 (본래의) “존재의 의미”는 언제나 지속적 현재라는 이념의 지평 안에서 파악되어 왔다. 그런데 “현재”는 시간의 한 양태가 아닌가? 존재의 해석에 끼어든 이 시간은 도대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존재”와 “시간”의 관련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해결의 실마리를 하이데거는, 다양한 존재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미 나름대로 “존재를 이해”하고 있으며,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 그 자신 철두철미 “시간적인” 존재인 인간 현존재 -- 현존재는 존재를 이해하며 존재하는 한에서의 인간을 지칭하는 하이데거의 독특한 표현이다 -- 에서 찾는다. 이렇게 존재의 의미를 묻는 존재물음에 존재를 이해하며 실존적으로 존재하는 인간 현존재가 문제를 푸는 열쇠로서 등장한다.

학문도 인간 현존재가 존재자와 맺는 관계맺음의 한 양상이다. 존재자에 대한 이론적 개념적 관계양상이 곧 학문인 것이다. 개개의 학문은 자기가 다루는 존재자 내지는 존재영역을 바르게 인식하여 그 존재자에 대한 정확한 이론적 개념적 정립에 이르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식의 학문적 관계맺음 이전에 이미 인간 현존재는 학문에서 다루고 있는 존재자와 이런 저런 관계를 가져왔다. 학문이전의 일상생활에서 인간은 이미 이렇게 존재자와 일정한 존재연관 속에 들어서 있으며, 그 안에서 그는 이미 항상 그가 관련을 맺고 있는 그 존재자를 이해하고 있다. 모든 학문은 결국 인간의 일상적 존재관련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존재이해”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모든 학문은 그 학문에서 다뤄지고 있는 존재자가 이미 드러나 있음(개방돼 있음), 이해돼 있음을 전제하며, 그렇게 이미 주어져 있는 존재자를(positum) 그 사실연관에 있어 개념적으로 규정 설명한다. 이렇게 주어져 있는 존재자를 다루는 학문이 곧 실증과학(positive Wissenschaft)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개별과학일 수밖에 없다. 개별과학은 자기가 다루는 존재자의 존재양식, 존재내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을 제공하지 못한다. 이를 위해서는 학문이전의 그 존재자와의 왕래 양상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 현존재의 존재자와의 관련에서부터, 거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개념이전의 존재이해”에서부터 우리는 존재자의 존재양식과 존재내용을 탐구해내어야 한다.

존재자의 존재를 이론적 개념적으로 규정하려고 시도하는 모든 노력을 넓은 의미로 “존재론”이라 할 때, 이 존재론 자체를 근거제시, 정초하려는 노력은 “기초 존재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초 존재론에서는 따라서 존재론 자체의 가능근거를 구명하고 있다. 존재론이 인간 현존재의 존재이해에 그 가능근거를 갖고 있다면, 기초 존재론에서 제일 먼저 문제시해야 하는 것도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이 “개념이전의 존재이해”일 것이다. 이 존재이해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존재를 이해하고 있는 인간 현존재의 존재를 해명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하이데거는, 발간된  『존재와 시간』 제일부에서 현존재에 대한 현상학적 실존론적 분석을 전개한다.



4. 인간 현존재의 실존성

철학사를 통해 인간은 객관주의-주관주의, 실재론-관념론의 도식적 분류를 넘어서 항상 특수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인간의 존재는 다른 존재자와는 전적으로 구별되는 것으로 항상 강조돼 왔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인간을 생각할 때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이라는 전통적인 정의를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이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에 대한 정의인 “ζωον λογον εχον”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고, 이 라틴어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많은 철학자들이 그것을 “이성적 동물”로 보다는 차라리 “언어의 능력을 갖춘 존재”로 번역하고 싶어한다. 어쨌건 위의 정의에서 보여지고 있는 것은, 인간은 동물은 동물이되 “이성”을 갖춘 빼어난 특출난 동물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있음이나 동물의 있음이나 그 있음(존재)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것은 둘 다 유한한 피조물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있음에는 구별이 없고 오직 그 본질에만 구별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것도 그 있음이 아니고 그 본질, 즉 “이성”인 것이다. 이 “이성”이 철학사를 통해 다양한 양상으로 강조돼 왔다. 영혼, 지성, 정신, 사고, 주체, 의지, 인격 등등은 이성에 대한 여러 다른 호칭이거나 측면일 뿐이다.

만약 이러한 “이성중심의 인간”을 강조한 철학사가 잘못된 존재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인간을 인간으로서 특징짓고 있는 것이 본질로서의 이성이 아니고 다른 존재자의 있음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왔던 바로 그 “있음”(존재)에 있다고 한다면...? 인간과 동물을 구별짓는 징표가 이성이 아니고 “있음”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인간에 대한 정의를 더 이상 “이성적 동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인간의 있음에 맞갖는 합당한 개념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오랜 철학사를 통해 오도된, 여러 선입견으로 물든 “인간”이라는 개념을 그 “있음”에서부터, 아니 도대체 “우리” 모두가 그 존재자인 그 존재자를 그 존재자에 맞갖게, 아무런 전제없이 구명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인간”이란 개념을 -- 그리고 이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된 주체, 의식, 자아, 인격, 정신, 의지 등등의 개념들까지 포함하여 -- 포기해버린다. 우리가 지금 그 존재의 본질을 구명하려고 하는 그 존재자를 “거기에 있는 존재자”, 즉 “현존재”(Dasein)라 부르자는 것이 하이데거의 제안이다.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만의 독특한 존재방식을 “실존”이라고 칭한다. 오직 인간만이 “실존”하고 있을 뿐이다. 실존은 일차적으로 인간이라는 현존재가 “존재하고 있다는 그 사실” -- 이것을 “현사실”이라고 부른다 -- 을 지칭한다. 그런데 인간의 이러한 적나라한 존재의 현사실은 나무 한 그루, 돌덩이 하나, 개 한 마리가 저기에 그렇게 있는 그러한 사실과는 질적(존재론적)으로 다르다. 인간의 있음은 그냥 그렇게 놓여 있음이나 눈앞에 있음이 아니라, 그 있음(존재) 자체가 떠맡아야 할 과제로 부과되어 있는 그러한 있음이다. 인간은 그 존재함에 있어 바로 이 존재함이 문제가 되고 있는 그러한 존재자인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떠맡아서 자신의 존재를 형성해나가며 존재해야 한다. 인간은 그가 지금 현재 무엇인 바 그것이 아니고, 그가 되기로 결심하고 되려고 노력하는 바 그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존재는 “가능존재”로서 인간의 있음은 폐쇄된 완료형의 “있음”이 아니라, 언제나 가능성에로 개방되어 있은 “할 수 있음”이다. 그리고 인간 현존재에게 그 존재함에 있어 문제가 되고 있는 바로 그 존재는 각기 “나의” 존재이다. 이렇게 하이데거의 “실존”개념에는 “각자 자기의 존재를 떠맡아 나름대로 자신의 존재를 존재해야 한다”는 현사실성, 존재이행(存在履行), 각자성(各自性)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이처럼 “있음”의 기술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실존을 실존 이외의 다른 존재자들을 기술하는 개념을 갖고 특징지으려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무리가 따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범주에 대비 실존을 위한 범주를 도입한다. 이 실존범주와 연관지어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그것이 종래의 “본질 형이상학”의 테두리를 벗어나기에 종래의 학문의 자명성의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하이데거는 실존으로 규정지은 인간 현존재의 근본구성틀을 “세계-내-존재”라 명명한다. 하이데거는 “세계 내 존재”를 하나의 단일적인 현상으로서 볼 것을 거듭 강조한다. 여기서 그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실존범주로서의 “세계”는 무엇을 뜻하는가? 둘째, 세계 내에 “누가” 존재하고 있는가? 실존을 “자신의 존재”로 규정했기에, 세계 내 존재에서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셋째, 세계 내에서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가 문제시되어야 한다. 현존재가 어떻게 존재를 이행해 나가고 있는지가 분석돼야 한다.



5. 존재자의 이해와 세계

하이데거의 현존재분석의 결과만을 간추려 본다면, 우선 “세계”란 흔히 생각해 왔듯이 존재자의 총체(집합체)가 아니다. 인간 현존재의 삶이 전개되는 그-안(das Worin)으로서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인간 없이는 세계도 없다는 말이다. 물론 인간이 없이도 “자연”은 존재할 것이다. 세계가 인간의 세계로서 의미를 갖춘 의미연관의 맥락이기에, 우리는 세계 안에서 대하는 모든 존재자를 “...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만년필을 만년필로서” 지각하는 것은 우리가 세계 내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만년필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눈이 빠지게 관찰하는 것도, 열어 보고 망치로 깨 보아 그것이 무엇으로 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화학기구의 도움으로 그 재료가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것도, 그 만년필에 의미를 주는 세계를 도외시한다면 모두가 다 쓸데없는 노력에 불과하다. 만년필이 아니고 어떤 역사적인 유물일 경우, 우리는 인간과 관련된 존재자의 “세계성”을 더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만년필을 갖고 노트에 글을 쓰는 그 사용연관사태를 떠나서 만년필의 존재를 알아보려는 노력은 애당초 빗나간 시도이다.

인간이 세계 내에서 만나고 있는 존재자를 하이데거는 인간과 무관한 무차별한 “사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손길이 닿아 있는 “도구”로 본다. 인간 현존재를 세계 내 존재라고 명명하듯이 도구를 하이데거는 “세계내부 존재자”라고 부른다. 우리가 세계 내에서 만나고 있는 도구로서의 세계내부 존재자는 우리의 일상적인 관심에서 “...에 도움이 되는”, “...을 위하여 적합한”, “...에 해가 되는”, “...에 중요한” 등등의 성격으로 나타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도구의 독특한 성질을 “지시”라고 지칭한다. 도구는 “...을 위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 지시를 도구전체성에서부터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망치를 갖고 못을 박고, 못에다 시계를 걸고, 시계를 보고 시간에 맞추어 학교에 간다고 할 때, 망치는 못을 박음을 지시하고 못을 박음은 시계를 걸음을 지시하고 시계를 걸음은 시간에 맞추어 학교에 감을 지시한다. 이런 식으로 도구는 도구의 사용용도에 따라 어떤 다른 것을 지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용용도의 전체 맥락을 하이데거는 사용사태의 전체성이라고 부른다.

도구는 항상 다른 것을 위하여 존재하므로 지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된다. 도구의 사용사태가 완결되려면, 어떤 한 존재자가 있어, 그 존재자는 더이상 다른 것을 지시하지 않고 그 자신을 지시해야 할 것이다. 현존재가 바로 그러한 존재자이다. 현존재는 그 존재함에 있어 각기 자신의 존재가 문제가 되고 있는 그런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그때마다 각기 자기자신을 위하여 존재한다. 다시 말해 자기자신의 실존 때문에 존재하고 있다. 이렇듯 “위하여의 연관”(Umzu-Zusammenhang)은 현존재의 “그-때문에”(Worumwillen)에 근거하고 있다. 이렇게 세계내부의 존재자가 각기 그때마다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이해의 지평은 인간 현존재의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 삶의 그곳으로서의 “세계”인 것이다.



6. 현존재의 이해와 자기존재

이제 우리는 자기자신의 실존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의 “주체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인간의 주체성을 지칭하기 위해 전통적인 철학에서는 흔히 “자아”(Ego, Ich)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 경우 사고, 행동, 감정의 주체로서 “자아”를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행동과 체험의 변화 속에서도 그 다양성이 동일한 축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그것을 곧 “나”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 “나”라는 주체의 주어져 있음보다 더 확실한 것이 무엇이냐고 데카르트와 후설은 반문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 일상의 현존에서 이 “나”라는 것이 삶을 수행해 나가고 있는 주체인가? 오히려 일상의 인간 현존재는 바로 자기가 그 주체가 아닐 때에 가장 큰 소리로 “그래 그것은 바로 나였어”라고 외치고 있지 않는가?! 하이데거는 이것이 인간 현존재의 존재양상에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인간 현존재는 각기 그때마다 나름대로 이렇게 또는 저렇게 자기의 존재를 이행해야 한다. 인간 현존재는 이미 항상 어떤 방식으로 자기의 존재를 존재해야 할지 결정하고 있다. 일상적 인간 현존재는 “남”이 하듯이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남들”이 하듯이 삶을 즐기며 영위하고 있다. 남들이 보고 판단하듯이 우리는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예술품을 비판한다. 남들이 하듯이 화를 내고 남들처럼 때때로 대중들로부터 물러나 가족들과 함께 주말을 보낸다. 이렇게 우리의 일상생활에 독재자처럼 군림하여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규정하고 있는 것을 하이데거는 “그들”(세인, das Man)이라고 칭한다.

일상생활의 현존재 안에서 우리는 고집스레 자신을 관철하는 주체를 찾기가 힘들다. 그 “남들” 속에서 “자아”라는 것을, 즉 현존재의 자아로서의 지속성은 찾을 수가 없다. 여기서 드러나고 있는 것은 결국 자아의 지속성을 어떤 것이 계속해서 눈앞에 있듯이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현존재의 자립성(Selbständigkeit)을 우리는 함께 더불어 있음 (Mitsein)이라는 인간 현존재의 존재방식에서 찾아야 한다. 일상성 속의 “남들”하고의 더불어 있음 속에서 과연 현존재가 어떻게 자기존재를 존재해 나갈 수 있고 나가야 하는지는 하나의 또 다른 중요한 문제이다.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있은 위에 너와 나가 같이 더불어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있음이란 항상 이미 더불어 있음이라는 사실을 하이데거가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7. 존재이행: 이해, 처해있음, 말

이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인간 현존재가 “어떻게” 세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이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인간 현존재는 자기자신과의 관계, 다른 현존재하고의 관계 그리고 세계 안에서 만나는 여타의 모든 다른 존재자하고의 관계 속에서, 그가 관계하고 있는 존재자를 이해하면서 존재한다. 존재를 이해하면서 존재하는 이 존재방식이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특징짓고 있다. 여기서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 현존재의 존재이행형태로서 존재자를 존재가능에로, 존재자를 존재에로 기획투사(entwerfen) 내지는 자유롭게 한다는 의미이다. 존재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따라서 그 존재자의 존재의미를 안다는 말이며, 그 말은 세계라는 의미총체성의 무엇-때문에(Worumwillen)에서부터 존재자를 의미부여한다는 말이다.

존재자를 존재가능에로 기획투사하는 “이해”는 그러나 이미 항상 어떤 한 기분이나 분위기에 의해 상황지어져 있다. 처해 있는 상황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기획투사란 있을 수가 없다. 인간은 자기의 존재를 존재가능으로 이행해 나가야 하지만, 여기서의 그의 존재는 그가 이미 항상 존재해온, 존재를 떠맡아 왔던 그 존재인 것이다. “왜”, “어디서”라는 질문을 던지기 전에 이미 인간 현존재는 근거를 알 수 없는 무근거의 존재를 현사실적인 것으로 떠맡았다.

처한 상황 속에서 존재자를 이해하는 기획투사는 또한 동일근원적으로 대화 안에서, 존재자의 존재를 다른 현존재자와 함께 더불어 나눈다. 대화 안에서 인간 현존재는 이야기되고 있는 존재자의 존재를 다른 현존재와 함께 같이 나누면서 자기자신도 드러내고 있다. 언어란 이러한 대화와 더불은 사건이 밖으로 말해진 것이며, 발언이란 존재자의 존재에 대해서 더불어 나누는 보여줌(제시)의 한 양상으로서 대화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8. 인간 현존재의 시간성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의 존재를 가능으로, 존재가능으로 파악하고 있다. 가능이란 것은 현재 만나고 있는 존재자에서부터 항상 새롭게 얻어내어, 자기 고유의 존재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미리 앞서 가보는 식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의 결정적인 점에서 이 가능이란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 즉 현존재의 최종의 피할 수 없는 가능은 죽음인 것이다. 그러기에 현존재는 자기의 존재가능과의 관계에서 항상 늘 -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가 아닌가의 차이가 있을 뿐 - 이미 “이러한 절대적인 현존재의 불가능이라는 가능”에 관계하고 있다. 현존재가 그것으로써 자기의 존재가능의 가능성을 붙잡고 있는 앞서가 있음(das Sich-vorweg-sein)은 “죽음을 향한 존재”안에 가장 근원적인 구체성을 내보이고 있다.

인간 현존재는 자기의 존재가능의 가능성들에 관계함으로써만 존재하고 있다. 이 존재가능의 건너뛸 수 없는 가능성은 죽음이다. 이 말은 곧, 현존재는 자기자신의 죽음과 관계를 맺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그러나 결코 다음의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즉 현존재는 항상 뚜렷한 의식 속에서 자기자신의 이러한 피할 수 없는 가능성을 결단의 맘으로 직시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이데거는 오히려 그 반대를 강조하고 있다. “현존재는 보통의 경우 대개는 우선 죽음에로 향한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피해서, 은닉하면서 존재한다.” “일상적인 죽음을 향한 존재”는 하나의 끊임없는 죽음에서부터의 도피이다. 죽음을 향한 존재는 오직 불안 속에서만 근원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기에, 죽음에서부터의 도피는 “죽음에 대한 끊이지 않는 안심”의 성격을 띠고 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불안의 용기가 피어오르게 놔두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이 “도피”가 거기에서부터 피하려고 하는 그 “무엇에서부터”를 보여주면, “도망치고 있는 현존재가 어떻게 자신의 죽음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드러내 보여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죽음에서부터의 끊임없는 도피 역시 그것과의 한 관계이다. 이러한 식의 특수한 죽음을 향한 존재양식에서부터 현존재 존재이행의 한 특수한 양태가 유출돼 나오고 있는데, 이것을 하이데거는 “비본래성”(Uneigentlichkeit)이라고 칭한다.

죽음이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개별인간으로 만들고 있듯이 “죽음에로 미리 앞서 가봄”(Vorlaufen zum Tode)으로써,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그 존재가능이 어느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각자의 고유한 존재가능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그의 죽음을 죽어줄 수 없듯이, 아무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그의 삶을, 존재를 살아줄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이 바로 나 자신의 죽음이듯이, 나의 삶 역시 나 자신의 고유한 존재인 것이다. 나는 죽음에 미리 앞서 가 보기로 결단함으로써, 나의 존재가능을 뚜렷하게 대신될 수 없는 나 자신의 고유한 존재가능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현존재가 자기자신의 “고유한”(eigenes) 존재를 이행하는 양태를 하이데거는 “본래성”(Eigentlichkeit)이라 칭한다. 죽음에로 결단을 갖고 미리 앞서 가 보는 것이 실존의 본래성을 위한 전제이다.

인간 안에서 그 인간을 특징짓고 있는 것으로 무한한 어떤 것, 절대적인 어떤 것, 필연적인 어떤 것을 찾았던 전통의 형이상학과는 다르게, 하이데거는 유한한 존재, 죽음을 향해 존재하고 있는 존재자, 개별자로서 상황에 얽매여 우연에 의해 규정되고 있는 존재자로서의 인간 현존재를 부각시킨다. 죽음을 향한 존재, 죽음을 미리 앞서 가 보는 존재로서의 인간 현존재는 나면서부터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존재가능으로서 죽음을 안고 존재에 내던져져 있다. 그래서 인간은 이미 태어남과 동시에 이미 죽기에는 충분히 늙어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시간성을 이러한 유한성 - 끝이 날 수 있음 - 에서부터 이해할 것을 주장한다.

인간 현존재는 유한하게 존재하고 있다. 인간 현존재는 그렇게 존재하면서 시간을 살고 있고 시간을 시간화시키고 있다. 시간적인, 유한한 존재자인 인간 현존재가 존재자와의 존재관련 속에서 이해하고 있는 존재가, 시간이라는 지평에서부터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 존재의 의미를 시간적, 초시간적, 무시간적(영원)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 그 외에도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존재가 시간의 의미로 파악되었다는 것은 인간 현존재의 유한성, 시간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근원적으로 논의되었던 것은 인간에 대해서가 아니며 존재일반의 의미에 대한 것이었다. 인간의 유한한 실존이란 이 목적에 이르는 통과점으로서만 고찰되어야 했다. 여기에서 시간이 인간 현존재의 이해가 행해지는 지평으로 입증되고 있다. 시간을 존재일반의 이해를 위한 매개물로서 표현할 수 있는지, 더 나아가서, 그 문제와 함께 “유한성으로 과연 존재 자체에까지 이를 수 있는지”라는, 그에 잇다른 질문과 함께 『존재와 시간』의 제일부도 막을 내리고 있다.



9. 하이데거 철학의 영향

하이데거 사상의 영향은 막대했고 아직도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의 제자 중에는 많은 낯익은 이름들이 있으니, 이를테면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칼 뢰비트, 허버트 마르쿠제 등이 그렇다. 프라이부르크 시절에 그의 밑에서 공부한 사람으로는 또 막스 뮐러, 베른하르트 벨테, 칼 라너, 요한 밥티스트 로츠 등이 있다. 하이데거는 후설의 현상학 테두리에 있는 사르트르, 메를로 퐁티, 오이겐 핑크 등에도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일본의 유명한 철학자들이 그의 밑에서 공부하려고 독일에 왔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오늘날에 와서 그의 영향의 흔적을 우리는 많은 프랑스 철학자에게서 찾을 수 있다. 쟝 보프레, 앙리 비로, 미셸 푸코, 쟈크 데리다 등은 직 간접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 비판이론의 대변가인 유르겐 하버마스도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철학의 흐름과 분과와 연관해서 볼 경우 하이데거는 실존철학, 현상학, 해석학, 존재론, 철학적 인간학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이데거의 사상적 영향은 철학의 테두리를 벗어나 타 학문에도 뻗쳤다. 의학 및 심리분석에도 (루드비히 빈스방거)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가톨릭 및 개신교 신학에도 (칼 라너, 루돌프 불트만, 폴 틸리히)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자연과학에도 (칼 프리드리히 폰 바이체커)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하이데거 사상의 수용과 비판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의 하나로 매우 불안정한 토대 위에 놓여 있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하이데거가 언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그것, 즉 존재로서의 존재가 본질적으로 어떠한 언어적인 고착도 벗어난다는 그 사실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 자신도 명제로 잡을 수 있는 구속력 있는 주장들을 내세우고 있지 않다. 단지 배움 자체를 가르치고자 할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면서 그 자신 다양한 주장들을 함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러한 주장들은 충분히 논쟁거리가 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이데거의 수용을 대단히 어렵게 만드는 것 중 다음의 사실도 그 하나이다. 즉 그 자체 충분히 분명하고 논증적으로 기술될 수 있는 많은 것을 하이데거 자신이 너무나 거창한 낱말이나 또는 단순한 암시로써 불투명하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독자는 쉽게 하이데거의 핵심적인 사상에까지 접근해 들어가지 못하는 위험에 빠지고 만다. 이런 면에 있어 아마도 하이데거 자신이 하고 있는 말, 즉 나의 사상을 위한 시간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는 말은 일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때에 그의 거창한 시도의 한계도 분명하게 밝혀져야 한다. 그 자신이 나중에 인정한 오류의 길들뿐 아니라 그의 사상의 단초에 기인하고 있는 한계들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자주 그의 철학에서는 사회적인 주제에 대한, 상호인격적 차원에 대한 논의가 배제되어 있다고 지적된다. 그로써 현대와 같은 복잡한 사회에서 인간이 행위하는 인간으로서 구체적인 실재의 역사 속에서 살아가면서 부대끼는 중요한 문제들인 사회정의, 인권 등등에 대한 물음들이 전부 떨려져 나오고 만다. 그러한 물음들에 대한 배제는 자신의 사유가 내재적 필연적으로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으로는 묵인되기 어렵다.

어쨌거나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을 공부하는 철학도로서 힘이 들어도 한번은 꼭 정복해야 할 봉우리로 우리 앞에 우뚝 솟아 있다.

하이데거 철학이 철학사에 기여한 철학사적 의미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이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 또는 삶의 맥락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학문

이미 하버마스가 옳게도 지적하였듯이 하이데거의 현상학 내지 실존철학이 현대사회에 기여한 가장 큰 공로의 하나는 “과학에 의해 식민지화되어 가고 있는 생활세계의 위기”를 깨닫게 해준 점이다. 이론이 그 발생론적 기반을 생활세계의 실천에 두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유래를 망각하고 자신이 추상해서 만들어낸 일면적인 시각을 유일한 시각인 냥 주장하고 자신의 척도가 유일한 의미척도인 것처럼 행동해오며 과학지상주의를 퍼뜨렸는데, 이것이 현상학에 의해 제동이 걸린 셈이다.


2) 주체적 인간에 대한 새로운 구명 -- 실존적 신체적 인간

근세철학이 가장 확실한 기반인 “사유하는 나”에서 출발하여 인간주체를 <사유>에서부터 규정하여 인간의 다른 차원을 간과하고 있음을 꿰뚫어 보고 인간의 주체성을 새롭게 규정해야 할 과제로 제시한 것은 분명 실존철학의 공로일 것이다.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나> 그리고 칸트의 <행위하는 나>도 인간의 신체적인 면이 배제된 지성적인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을 간파하고 인간을 <관계맺는 나>로 보게끔 만든 것은 바로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적 통찰이다. 유한보다는 무한을, 시간보다는 영원을, 개별보다는 보편을, 육체보다는 영혼을 선호하며 그것만이 철학의 이상적인 주제라고 천명하며 추구해온 전통철학이 따지고 보니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나 보려고 한 실존적인 몸부림임을 꿰뚫어 보게 된 것이다. 가장 확실한 것이 <나는 죽는다>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보편화시켜 <인간은 죽는다>로 만들고 그 보편적인 죽음 너머에서 철학함의 주제를 긁어모으느라 노력한 것은 결국 가장 자명한 진리인 <나의 죽음> 앞에서의 도피이며, 나의 신체를 외면한 결과일 뿐이다. <나>는 육체에서 해방된 사유로서의 주체도 아니고 순수의식으로서의 초월론적(선험적) 자아도 아닌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 지금 여기 살고 있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바로 이 <나>인 것이다. 나는 바로 나의 육체(신체)이다. 육체의 발견이 실존철학이 이룩해 놓은 공로의 하나이다.


3) 상황에 내던져진 인간

사유 내지는 순수의식으로서의 <나>는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역사나 문화에 예속됨이 없이 대상을 자기 앞에 마주 세워 놓으며 대상을 구성하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지만, 이제 육체를 가진 인간은 더 이상 그러한 영원과 보편 속을 떠다닐 수 없게 된다. 실존적 인간은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언제나 상황 속에 내던져져 있는 존재이다. 그는 그가 원해서 그러한 상황 속에 존재하게 된 것도 아니고 또 그는 그가 만나는 대상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지도 못한다. 인간은 <세계 속의 존재>이며 그는 우선은 그가 관여해 본 적이 없는 그 <세계>에로 선택의 여지없이 내던져져 그 세계에서 통용되는 삶의 논리와 문법을 배우며 그 세계의 일원으로 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 <세계 속의 존재>인 인간이 무기력하게 주어진 상황에 운명적으로 떼밀리어 자신의 일생을 살아나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의 상황을 떠맡아 거기에서 자신의 최대의 존재가능성을 길어 내올 수 있다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4) 시간적 · 역사적 인간

육체를 가진 인간은 무엇보다도 육체의 제약 속에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육체를 감옥으로 생각하고 육체를 벗어난 순수한 영(靈)의 상태를 이상적인 본래적인 상태로 꿈을 꿀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꿈도 결국 인간이 본질상 육체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꿀 수 있는 것이다. 육체가 갖고 있는 최대의 제약은 죽음이다. 그래서 실존철학자들은 한결같이 죽음을 인간을 규정하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로 간주한다. 그래서 인간은 -- 방식이 다를 뿐이지 -- 언제나 항상 명시적으로건 묵시적으로건 죽음과 관계를 맺으며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존재방식을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명명한다. 인간은 철두철미 <죽음을 향한 존재>이기에 그의 이러한 본질적 차원이 인간이 행하고 이룩해 놓은 모든 것에 각인되어 있다. 인간은 <끝을 향한 존재>로서 유한한 존재이기에 인간만이 자신의 종말과 관계를 맺으며 그 종말을 어쩔 수 없는 나의 불가능성의 가능성 또는 가능성의 불가능성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삶의 끝을 마감할 수 있다. 인간만이 죽을 수 있는 존재이다. 죽을 수 있는 존재인 인간은 자신의 죽음에로 미리 앞서 달려가 미래에로 자신의 가능성을 기획투사하여 그 가능성 아래에서 자신의 존재가능성을 기획하여 현재를 살아나간다. 그러한 존재가능성 아래에서 과거의 현사실적 존재해 왔음을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로 떠맡아서 새롭게 반복하여 재해석하며 과거를 다시 잡을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인간의 있음은 단순한 눈앞에 있음이 아니라 <과거를 떠맡고 미래를 기획투사하며 그 가능성 아래에서 현재를 존재해나감>으로서의 <시간적으로 있음>이다. 이러한 시간적 있음이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사건 내지는 생기>이며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나의 존재적 생기가 곧 나의 <역사>인 것이다. 나의 역사는 내가 그 세계에서 태어나 그 세계의 역사를 떠맡아서 존재하고 있는 그 민족적 역사의 한 부분이다. 어쨌거나 인간의 역사성은 바로 인간이 시간적으로 존재함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인간은 자신의 역사적 상황을 떠맡아 결단을 내려 새로운 역사적 지평을 열어나가야 할 임무를 띠고 있다.


5) 본래적 인간 -- 비본래적 인간

플라톤이 이데아(Idea)의 세계와 독사(Doxa)의 세계를 구분하였듯이 철학의 역사와 더불어 본래성과 비본래성의 구별은 항상 있어 왔다. 그런데 실존철학에서 본래성과 비본래성을 나누는 구별의 준거점이 과거의 어느 것하고도 다르다. 그것은 곧 실존철학이 발생하게 된 시대적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하고 뗄 수 없는 연관이 있다. 이제 인간은 이론적으로 형식적으로 주체이고 자유롭고 평등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실제적으로 그리 되기를 요구주장하기에 이르렀고 사회적 제반 여건도 그것을 위해 성숙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의식의 성숙의 열매가 <실존>이라는 개념 속에 농축되어 들어온 것이다. 실존은 한마디로 인간의 있음이 단순한 사실적인 눈앞에 있음이 아니라 과제로 부과되어 있음이기에 그 존재적 독특함은 곧 <존재해야 함>이며 그것도 각자 자신의 존재를 떠맡아 각기 나름대로 <자신의 존재를 존재해야 함>이다. 그래서 오로지 인간에게만 그 있음(존재)이 완성된 존재로 주어지지 않았으며 인간은 존재하면서 바로 자신의 존재(있음)가 문제가 되고 있는 그러한 존재자인 것이다. 인간에게는 지금 그가 무엇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으로 존재하기를 결단내리고 있는가 하는 그의 존재가능이 결정적이다. 인간은 그가 결단내린 그 존재가능에 따라서 지금의 자신의 존재를 존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존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사실적 존재를 자신의 존재로 떠맡아(현사실성) 자신의 죽음에로 앞서 달려가 보아 자신의 존재가능성 아래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택해서(기획투사) 결단을 내려 자기가 되기로 마음먹은 그 존재가능을 지금 여기서(결단의 순간) 실현해 나가며 존재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실존의 본래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인간은 우선 대개 결단을 내리지 않고 남이 자신에게 전해주고 있는 존재가능을 인수받아 거기에 맞춰 살아나간다. 이렇게 자기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을 결단내려 결정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그들(세인)이> 지정해 주는 존재가능을 아무 저항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사는 존재양태를 비본래적 양태라고 이름한다. 인간은 우선 대개 이러한 <그들의 세계> 속에서 안온함과 포근함을 느끼며 <그들>의 삶의 논리와 문법을 따라가며 살 때 정상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인간의 실존은 이렇듯 <그들>의 세계(사회성)와 <나>의 실존적 세계 사이의 긴장 속에서 그 긴장과 더불어 존재함을 말한다. 사회세계를 떠난 실존세계가 있을 수 없고 실존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세계가 있을 수 없음을 보고 있는 것이다. 현대 인간의 과제는 이러한 긴장을 어떻게 잘 풀어나가는가 하는 거기에 있는 셈이다.



6) 세계를 형성하는 인간

인간은 고립된 생각하는 자아가 아니라 <세계 속의 존재>이다. 세계를 떠난 인간을 생각할 수가 없기에 외부세계의 실재성을 증명해야 하는 것을 철학의 과제라고 생각했던 발상 자체가 <철학의 스캔들>이다.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자연세계, 사물세계, 인간세계의 한가운데 던져진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자기가 던져져 있는 그 세계의 법칙과 삶의 문법을 배우며 세계존재로서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세계존재로서 존재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이렇듯 인간의 인간됨에는 <세계형성>이 본질적으로 속한다. 인간은 <세계>가 열어 밝히고 있는 존재의 빛 안에서 존재자를 발견하며 그 존재자를 <어떤 것으로서> 대하게 되는 것이다. 선행적인 <세계이해>없이는 구체적인 도구나 사물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이 그 안으로 내던져지는 <세계의 지평>은 고정된 크기의 어떤 것이 아니다. 인간은 이해의 지평을 확장해 나가면서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의 지평>을 넓혀 나간다. 이렇게 인간의 본질에 <세계형성>이 속하기에 인간의 세계는 시대적으로 문화적으로 각기 다른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다. 각기 다른 세계에 각기 다른 삶의 논리와 문법이 통용되어 왔고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특정의 세계에서 통용되어 온 삶의 논리와 문법을 유일한 세계의 논리와 문법으로 주장하는 오류를 저질러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이 <세계현상>에 주목하게 한 실존철학과 현상학의 철학사적 공로라 할 수 있다.



7) 이해의 지평(삶의 문법)을 묻는 인간

현상학과 실존철학에서 구명하고 있는 <초월론적 자아>는 내용이 없는 형식적인 <생각하는 자아>가 아니라 <세계를 형성하고 이해하는 해석학적 주체>인 셈이다. 인간의 독특함을 관계맺음에서 보고 이러한 관계맺음에서 자신이 관계맺고 있는 그것을 어떤 형태로든지 언제나 항상 이해하고 있음에서 보고 있는 것이 해석학적 주체의 본질특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이러한 관계맺음과 이해의 구조를 파헤쳐 구명해 보는 것에서 철학의 과제를 보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해석학적 탐구의 성과 중의 하나는, 대상을 구성하고 세계를 형성하는 이른바 <초월론적 자아>가 시원을 자기 안에 갖고 있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그 역시 <구성된> 존재라는 것을 통찰한 데 있다. 따라서 이 <초월론적 자아>는 내용 면에 있어 그가 놓여 있는 역사적인 조건과 해석학적 상황에 얽매여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기에 형식적으로 우리가 동서양을 막론하여 구별 없이 <초월론적 자아>를 이야기하긴 해도 내용적으로 동양의 <초월론적 자아>가 서양의 그것과 결코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듯 초월론적 자아에 대한 해석학적 탐구는 각기 다른 문화권에 각기 다른 세계가 있으며, 그로써 또한 각기 다른 이해의 지평이 열어 밝혀져 있고 각기 다른 삶의 논리가 전개되고 있음을 통찰하게 하였다. 따라서 현상학과 실존철학이 그것을 수용하고 있는 우리에게 주체적으로 부과하고 있는 과제의 하나는 바로 우리의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존재의 사건>, <진리의 사건>, <세계형성의 사건>에로 눈을 돌려 우리 자신의 <초월론적 자아>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우리의 세계이해의 지평을 열어 보이고 그 세계에서 통용되어 왔고 통용되고 있는 삶의 문법과 논리를 밝혀내는 과제일 것이다.

이상이 우리의 논의와 연관지어 본 중요한 철학사적 의미들이다. 물론 여기서 열거한 것 외에도 <이성 자체에 대한 비판>, <과학의 환원주의적 태도 비판>, <주객도식의 탈피와 상호주관성의 발견> 등이 현상학과 실존철학이 철학사에 기여한 공로임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10. 하이데거 철학의 메시지

1) 이 땅에서의 존재사건에 관심갖기

왜 도대체 무(無)가 아니고 존재(자)인가? “도대체 왜 존재자가 있고 도리어 무는 없는가?” 하이데거는 그의 강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를 이 말로 끝맺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 아니 이 우주는 온통 존재하는 것으로 가득차 있다. 이 우주는 존재의 사건으로 시작되어 끊임없이 존재의 사건 속에서 존재해나가고 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우리는 온통 존재하는 것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야말로 존재사건의 한가운데에 존재하고 있다. 우주는 이렇게 존재사건의 와중에 놓여 있으며 존재신비의 한가운데 놓여 있지만 인간이 존재하기 전까지는 어느 존재도 이러한 신비를 경탄하지 못했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 인간 안에서 깨어난 시기를 철학탄생의 시기로 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존재자가 있다는 이 사실 또는 존재가 있다는 이 사실보다 더한 수수께끼가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존재에 대한 경이는 식어가고 모든 것이 일상의 자명함과 학문의 확실성 안에 편입되어 인간은 놀랄 필요 없이 자신의 세계에서 안정과 평안을 누리며 안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존재에 대한 망각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망각이기에 존재에 대한 회상을 통해 인간을 본래의 자기 자신에로 불러 세우고자 하는 것이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이 모색하고 있는 바라 할 수 있다.

어떻게 해서 존재에 대한 놀라움이 일상의 다반사가 되어버렸는가 하는 존재망각의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볼 때 그 밑바탕에는 언제부터인가 본궤도를 이탈한 서양의 형이상학에 대한 이해가 깔려 있음을 알게 된다. 존재하는 것 전체를 인간의 이해 안으로 끌어들여 보려는 서양의 형이상학적 노력을 뒤밟아 볼 때, 거기에서 무엇보다도 존재자 중심의 태도, 모든 것의 최종 근거를 구명하려는 근거해명의 의지, 신적인 존재로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신학적 요소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개념으로 장악하려는 학문적인 자세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존재자 중심이고 신학적이고 이론적인 형이상학적 추구에 의해 배제되고 제외되고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존재의 범주 속에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가서도 안 되는 무(無)이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마련해야 한다. 존재자 중심의 시각을 버리고 더 포괄적인 형이상학적 관점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에 대한 경험에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무를 대면하게 되는 경험의 장은 이론적 태도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존재함이다. 존재에 대한 놀라움 역시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추론에 의한 경탄이 아니라 존재의 사건 한가운데서 존재하면서 느끼는 우리의 존재적 놀라움인 것이다.

존재자 중심의 태도를 버리고 이론적 해명의 의지를 버리고 존재 사건 자체에 마음의 눈을 열 때 우리는 지금까지 보지 않았고 볼 수 없었던 존재진리의 새로운 차원을 대하게 된다. 존재자를 눈앞에 현전하게 하면서 자기 자신은 뒤로 물러나 숨기는 존재의 사건을, 현실을 박제(剝製)시키려고 대드는 모든 개념적인 노력의 저편에 놓여 있는 존재의 사건을, 명제의 진리만을 아는 학문적인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진리의 사건을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에 대한 학문이기를 자처하는 자연과학이나 그 자연과학의 토대를 마련해준다고 뽐내는 메타-자연과학(형이상학, Meta-Physik)이 사실은 자연의 자연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자연을 계산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놓고서는 마치 자연을 다 설명한 듯이 뻐겼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현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지구 전체를 파국의 낭떠러지로 몰고 가는 생태계의 위협도 결과적으로는 그러한 잘못된 형이상학적 태도에서 기인했음을 통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참다운 형이상학이라면 이제부터라도 자연의 자연성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유치하다고 학문의 장에서 내몰은 하늘과 땅, 신적인 것과 죽을자를 새롭게 고찰해야 한다. 전수된 형이상학적 체계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그 체계가 안고 있는 생활세계적 지평과 그 한계를 밝혀내어 <형이상학 형성의 논리>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서양의 형이상학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고 새로운 대안적 형이상학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란 변하지 않는 영원한 이념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주어지는, 역사와 문화 속에서 주어지는 선물임을 통찰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존재가 주어지는 역사적 사건[존재역운(歷運)적 사건]에 눈을 돌려야 하며 그 사건의 법칙에 마음의 눈을 열어야 한다. 존재의 소리에 부름을 받은 형이상학적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이고 수행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지를 우리는 새롭게 구명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하나의 지구, 하나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지구적 시대를 맞이하여 과거 어느 때보다도 서로 협심해서 현대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지구적 위기에 공동으로 대처해 나가야 할 당위성을 깨닫고 있다. 여기에 유럽과는 다른 문화적 전통 속에서 살아온 한국의 철학자들이 해야 할 과제가 주어진다. 그것은 곧 동양 문화권에서 일어났으며 일어나고 있는 존재사건에 주목하여 그에 대한 여기 이 땅에서의 인간 현존재의 대응방식을 연구하여 그 독특함을 천착해 내는 일이다. 서양이 자기중심적인 우월감 속에서 자신만의 전통을 고집하며 그 시각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형이상학적으로 존재자 중심, 로고스 중심으로 고찰해 왔다면, 일찍부터 서양문화의 침투 속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존재자 전체에 대한 시각을 바꾸어야 했던 동양인들의 열린 시야가 이제는 문제를 새롭게 보는 데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동양인들은 어쩔 수 없이 세계문화적인 시각 속에서 사물을 보고 판단하고 행위하며 살고 있는 셈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적 숙고이다. 우리의 전통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달라진 해석학적 상황과 이해의 지평에 대해 성찰하여 우리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존재이해의 틀을 만들도록 힘써야 한다. 거기에 분명 무(無), 공(空), 허(虛) 등의 비존재적인 것에 유난히 관심을 많이 쏟아 왔던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태도가 유럽인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존재에의 길을 열어줄 수 있는 가능성이 놓여 있다. 지금까지 <비논리적>이며 <신화적>이고 너무나 <애매 모호하다>고 학문적 논의의 장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많은 주제들이 실은 존재사건에 대한 참다운 대응방식에 관심을 두었던 선조들의 조심스러운 사유태도에 기인한 것임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존재발생사건에 대한 다른 시원적 대안적 대응투사방식을 찾는 현대의 지성인들에게 모종의 기여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를 할 수 있다.

현대에서 존재가 자신을 주고 있는 새로운 [존재파견의] 존재역운적 사건에 우리 자신을 열어놓고 열어놓은 채 우리 자신을 그 존재사건에 내맡겨야 한다. 그러면 형이상학적인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말건네오는 존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소리에 귀기울이면서 우리는 우리 시대에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존재의 요청에 응해 존재론적 차이를 맞갖게 내어나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하이데거의 사상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도전적 요청이다.


2) 탈근대의 메시지: 이성중심, 인간중심, 서구중심에서 벗어나기

여기 이 땅에서 철학하기, 한국인으로 한국에서 철학하기,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자리매김 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물음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물음이이다.  그것은 서구적인 철학함이 가지고 있는 한계, 문제제기에 대한 대안 모색의 한 노력이며 대응책 마련이라 할 수도 있다.  우리는 대안으로 삼을만한 큰 줄거리의 방향을 탈근대에서의 철학함의 동향을 점검해 보면서 취하고, 지금까지 역사의 변방에 있던 이 땅의 지성인들이 이 땅에서 중심을 잡아 우리의 말로 철학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가, 그리고 이러한 이 땅에서의 철학이 막다른 골목에 봉착한 서구적 철학의 대안이 될 수 있지는 않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면서 모색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에서 사는 인간의 삶의 심층문법에 터한 철학으로 우리는 <살림살이의 철학>을 다가오는 21세기 세계철학의 한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현 단계에서는 살림살이의 철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정리가 필요하다.  여기서는 그 발상의 단초를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탈근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이전의 철학적 큰 흐름이 결국 이성중심이었으며, 이성중심은 주로 합리성, 합리화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달되어 왔다는 점이다.  이러한 합리성과 합리화는 순전히 이론적, 인식적 합리화, 기술적 합리성으로 됨으로써 도덕적, 실천적, 미학적인 차원은 배제되고, 주로 이론적 합리성 혹은 과학적 합리성이 세계를 지배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하버마스에게서 과학에 의한 생활세계의 합리화 내지는 식민지화라고 표현되기에 이른다.  인간은 순전히 기술적, 도구적, 목적적 합리성이 추구되는 세계 안에서 기술적 합리성, 도구적 합리성, 목적적 합리성에 의해 머리로만 사는 인간으로 규정되어버리게 되며, 이렇게 머리로만 사는 인간은 반대급부로 냉혹한 인간, 기계적인 인간, 즉 가슴이 없는 인간으로 되기가 쉽다.  이렇게 가슴이 없는 인간이 만들어낸 끔찍한 짓거리의 예로 우리는 히로시마의 원폭,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대량 학살 등을 들 수 있다.  

이렇듯 이성을 강조하는 서양의 역사는 아이러니하게도 반이성의 극치로 치닫게 된다.  20세기 들어서 인류가 깨달은 것은 서구적인 사유태도와 삶의 방식에는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서구문명이 깨인 문명이라 하여 퍼뜨리고 있는 서구의 가치관이라는 것도 지구상 곳곳에서 온갖 부작용을 일으키며 그전보다 더한 가치관 혼란과 극심한 생태계 파괴를 몰고오고 있다. 서구철학 내에서도 결코 이전처럼 그대로 나아갈 수는 없다는 자성이 일고 있다. 이러한 커다란 흐름이 탈 근대적인 운동으로 대두되기에 이른다.  이 흐름의 표면적인 시작은 1968년의 <68 학생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때의 학생운동이 보여주는 의미는, 자본주의로 대표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안고 있는 모순이 표출되기 시작하여, 결국 미국과 유럽의 학생운동으로 확산되어 나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불만은 1968년 체코에서의 ‘프라하의 봄’이라는 사건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결국 사회주의 체제는 1989년을 기점으로 붕괴되어 버리게 된다.  이렇게 되어 양대 이데올로기 체제로 전세계를 둘로 양분해 놓았던 사회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자본주의로 대변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통합되어 가는 듯 보인다.  

이성중심이란 엄밀하게 말하면 인간중심이며, 그 밑바탕에는 서구적인 인간상이 깔려 있다.  서구적인 인간상은 인간을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식으로 인간에게서 이성적인 측면만을 부각시키며,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그리스도교적 인간관에서 출발하는 인간에 대한 시각이다. 이러한 인간관에 고무되어 인간은 지구의 주인으로 자처하며 지구를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인간은 인간의 문제를 넘어서 자연을 황폐화시키고 피폐화시키기에 이르렀다. 인간은 뒤늦게 자연파괴가 인간의 절멸을 초래할지도 모름을 조금씩 깨달으며 이러한 위기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 많은 지성인들이 그 모든 위기의 근원은 공격적인 서구적 생활방식과 사유태도에 있는 것으로 진단한다.  그리고 서구적 생활방식과 사유태도의 밑바탕에는 서구적 형이상학이 깔려 있다고 본다.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서구적 형이상학의 세계가 서양중심, 인간중심, 이성중심, 존재자(존재하는 것) 중심의 사유태도를 조장해 왔으며 그것이 결국 근대성의 핵심을 이루고 있기에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을 철학적 추세의 하나로 보고 <탈-근대>를 외치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서구적 형이상학이 서구중심이라는 하나의 절대 중심만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이는 중국의 중화사상과도 같은 것으로써, 오로지 <하나의 중심>만이 있고 나머지는 변방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하나의 이성, 하나의 언어, 하나의 진리, 하나의 문화, 하나의 세계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비판이론가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계몽의 변증법>이란 이성에 의해 모든 것을 설명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인데, 그것이 현대에 와서는 기술과 과학이라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드러나게 된다.  계몽의 변증법이 퇴치한 것을 신화라 한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계몽의 정점에 오른 현대에 와서 기술이라는 신화, 과학이라는 신화를 새로이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신화를 벗어난 것을 계몽이라 한다지만, 우리는 이렇게 단지 새로 만든 다른 신화로 이전의 신화를 대치했을 뿐이다.  

그런데 탈-근대적 인간들에 의해서 하나의 중심관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하나의 중심관이 무너지게 되면서 다른 세계의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이렇게 다른 세계도 똑같이 나름대로의 이성, 나름대로의 언어, 나름대로의 진리, 나름대로의 문화, 나름대로의 세계가 있음이 인정되면서 진리발생의 세계는 확장된다.  

현대에 와서 우리가 소련과 동구의 붕괴와 재편성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세계가 <언어>를 통해서 재편성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이제까지는 정치적인 체제와 이념에 의해서 통합되었던 세계가 세계의 인위적인 중심이었던 이데올로기가 무너지면서 자연스러운 세계의 중심요소인 언어에 의해서 재편성되고 있다.  본질적으로 이성이란 언어 없이는 가능하지 않으며, 진리 역시 언어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문화와 세계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이제 언어의 수만큼 중심이 있게 되고 언어의 수만큼 세계가 있게 된다.  따라서 언어의 수만큼 세계는 분리되어야 한다.  근대화의 핵심은 본래 언어에 있다.  이것이 무시되고 그 동안은 정치적 이념이 세계를 강제로 하나로 묶어 놓았는데, 이제서야 비로소 근대화라는 것 자체가 자국의 정신(언어)을 중심으로 이행되는 셈이다.  이렇게 서구 중심에서부터 벗어나려는 탈-근대의 추세가 강화되면서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모든 국가와 민족은 자기 나름대로의 중심잡기를 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3) 스스로 중심잡기: 이 땅에서 철학하기

포스트 모더니즘이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메시지는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를 우리의 언어로 보고 말하며, 우리의 언어로 이론을 정립하고, 우리의 언어로 사유를 하라는 것이다.  언어는 세계를 보는 눈이다.  그간 우리는 남의 눈을 빌려다가 우리의 세계를 보려고 안간힘을 쏟으며 많은 시행착오를 저질렀다.  이제라도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세계를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하나의> 유일한 세계에는 획일성이 그 세계를 지배하게 마련이다.  그 세계에서는 문화, 종교, 언어 등이 하나로 단일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중심이 여럿임을 인정하게 되면, 각자의 자율성과 자주성아래 각자의 고유성과 특수성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면 거기에서부터 획일성의 세계가 아니라 다양성의 세계가 열리게 된다.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다양성의 추구와 예찬이라 할 수 있다.  생산과정의 근대적 특징은 모든 것을 획일화시켜 많이 만들어 내는 대량생산체제였지만, 이제 탈-근대시대에 이르면 차이와 멋을 강조하는 생산체제가 전면에 부각된다.  데리다는 <차이의 형이상학>을 주장하는데, 이 또한 다양성이 강조될 수 있는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제는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가 중시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21세기 문화의 시대에는 획일적인 문화가 아니라 각각의 문화권이 스스로 중심이 되어서 자립적으로 만들어내는 다양한 문화가 꽃을 피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도 우리가 중심이 되어 우리만의 독특함, 우리만의 색깔을 찾아 우리의 고유한 문화를 꽃피어 세계를 아름답게 수놓을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것은 곧 ‘세계화 속에서의 한국화’로 이어진다.  그것은 사회학에서도 자주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흔히 Glocalization(Global+Localization, 세방화)이라고 지칭된다. 그것은 세계화뿐만 아니라 지역화도 이루어야 한다는 요청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변방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부담스러운 과제이면서 임무일 것이다.  더욱이 국경이 무너진 후 모든 것이 경제 중심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지금, 그 과제는 해내기가 몹시 어려운 것임에 틀림없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정치가 중시되었고 맑스 이후 경제가 삶의 축이 되었으며 지금은 기술이 가미되면서 그 중심 축이 변화하고 있다.  여기에서 문제는 기술과 경제가 손을 잡고 있다는 데에 있다.  경제와 기술을 조종하고 있는 것은 <군수산업>이라 할 수 있으며 그것은 결국 미국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 중심을 잡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미국식의 유행과 미국이 만들어내고 있는 <하나의> 세계에로 빠져 들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세계화>라는 개념이 올바로 정립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미국화하면서 그것을 세계화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세계화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천차만별의 다양하고 독특한 꽃들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적인 꽃을 피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우리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워야 하며, 그때 비로소 올바른 세계화를 이루어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1세기는 문화전쟁의 시대라고도 말해진다.  이렇게 우리는 그간 강조되어왔던 경제일변도의 세계로부터 이제는 문화적인 특수성을 찾아 그것을 발전시키는 문화의 시대에 살게 된다. 이렇듯 세계화 속의 한국화의 필연성은 말 그대로 필연성, 필연적인 것이다. 독일어에서 필연성이란 Notwendigkeit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Not는 위기를 뜻하는 것이며 wenden은 향한다라는 의미이다.  즉 우리가 어떻게 위기에 대응하는가 하는 것이 독일어에서 Notwendigkeit이고, 이는 필연성, 혹은 필요성이라 번역될 수 있다.  다시 말해 Notwendigkeit란 위기에 대응하는 대응방식을 뜻하는 것이다. 세계화라는 위기를 맞아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된다면, 우리는 ‘한국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올바로 대응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화’라는 추세 또는 위기의 의미이다. 따라서 ‘세계화’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에 관한 이해가 필요하다.  


4) 인간은 사이-존재 [사이에-있음]

그렇다면 이제 우리 식의 필연적인 대응(즉 Notwendigkeit라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먼저 인간에 대한 그림까지도 새롭게 그려야 한다.  즉 서구에서는 인간을 동물은 동물이되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식으로 그려내었고 그것이 변할 수 없는 진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인간상이 필요하니 그것을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우리는 ‘사이 존재’, ‘사이에 있음’이라는 우리말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말의 말놀이에 유의하여 인간, 시간, 공간, 천지간(天地間)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하이데거에게서 인간은 ‘세계-안에-있음’이라 명명되는데, 이는 인간은 이미 만들어진 세계 안에 던져져 있으면서 동시에 또한 거기에서부터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존재자라는 의미이다.  하이데거의 인간 해석에서의 독특한 점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하이데거 이전에는 세계를 확실한 것으로 보지 않고 오로지 ‘나’만이 확실한 토대가 된다고 생각하여, 우선 확실하게 있는 이 ‘나’가 세계를 만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식이었다.  이러한 근세적 사유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나 이외에 세계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이다.  즉 나는 확실한데 세계는 확실하지 않다는 것, 곧 나와 세계가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근세의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오히려 반대로 확실한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 ‘나’는 가장 가까운 듯하면서 실은 가장 먼 것이다. 반대로 세계는 가장 먼 듯하면서 사실은 가장 가까운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안에-있음>이라 규정하면서 인간에게 세계는 전제될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한다. 인간은 자신을 세계 안에 던져져 있는 것으로 발견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인간은 세계 안에 던져져 있으면서 그 세계 안에서 ‘남들’이 사는 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오히려 이제 과제는 ‘나’는 누구인지, 나 자신을 찾아내는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인간을 한번 세계-안에-있음이라기보다는 <사이에-있음>이라고  규정해보려 한다.  이렇게 시도해보면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문제와 관련지어서도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환경이란 인간이 사는 삶의 영역이다. 이것이 나중에 자연환경이라는 개념으로 바뀌게 된다. 환경이라는 개념 자체는 이미 인간중심적인 것이다.  서구의 인간중심적 사고가 환경이라는 개념으로 나오게 된 것이며, 더 나아가 환경학 혹은 환경철학이라는 개념이 생기게 된 것인데, 이것은 다분히 인간이 중심이 되어 인간이 잘살아보기 위해 땅을 포함한 모든 인간 삶의 주변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생태학(Ökologie, Ecology)과 경제학(Ökonomie, Economy)은 같은 어원을 갖는다. 즉 Oikos라는 그리스어로부터 나온 것이다. 거기에는 집, 가정, 거주라는 뜻이 있는데, Ökonomie는 집안 살림살이를, Ökologie는 지구 살림살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말에서는 Ökologie와 Ökonomie가 나누어져 있지 않고 <살림살이>라는 말로 합쳐져 있다. 즉 살림을 생활화하는 살이라는 우리말 <살림살이>는 살림을 두 번이나 강조하는 말이다. 이렇게 <살림살이의 철학>은 인간중심적 사고를 대체할 수 있는 방향을 지시할 수 있다. 환경학이 가지고 있는 인간중심적 사고는 인간이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관장하는 관점인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살림살이의 철학이다.  

인간이란 결국 <사이에 있는 존재>인데, 그렇다면 그 <사이>란 무엇인가?  

우선 ① <빔-사이>(공간)를 보면, 애초에 인간의 공간은 삶의 공간이며, 그것은 인간이 베어내가며 만들어내는 삶의 터전이다.  빔-사이에 있는 인간이 빔-사이와 관계맺고 있는 가장 전형적인 행위는 <노동>이다.  이렇게 노동이 도구, 기술, 예술, 생산, 거주라는 방식으로 이어지면서 인간은 사이에-있음으로서 빔-사이를 채워나가며 사이를 나름대로 인간적인 과정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빔-사이에 있는 인간의 중심축은 <몸나>라고 할 수 있다.  몸으로서의 나가 모든 것을 통해서 땅이라는 공간을 일구어 나가는데, 이 몸나가 경험해 나가는 차원은 감각적, 미학적 차원이고 그것은 제작이라는 형태를 띤다.  몸나가 살기 위한 숨을 <목숨>이라 한다.  현대에 와서는 이 빔-사이의 간격을 없애려고 하지만 사이는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성의 시대, 차이의 시대라는 것은 인간이 가까와지기는 하여도 차이를 차이로서 인정하고 차이를 차이로서 뛰어넘을 수 있는 그런 시대임을 말한다.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  즉 인간이 네 가지 차원에서의 사이에-있음을 유지하고 보호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인간다움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공간이라는 빔-사이를 없애는 것은 기술로써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를테면 교통과 통신이 그것이다.  그러나 과연 공간적인 간격을 없앰으로써 인간이 가까움을 얻었는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제기이다.  

② 인간, 즉 <사람-사이에 있음>에서 가장 전형적인 행위는 <말>이며 관계맺음의 방식으로는 <실천>을 들 수 있다.  말함과 실천에서 관습, 윤리, 도덕, 사회, 국가 등이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사람-사이에 있음으로서의 행위는 윤리적인 행위, 만남, 인격적인 체험 같은 것이며, 이를 통해  사이를 메꿈이 가능하다.  이것이 사람-사이에 있음이 사이를 두면서 맺고 있는 관계맺음의 방식이다.  사람-사이에 있음을 이어나가는 중심축으로 <맘나>를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맘나는 마음씀이다. 그 사이에 숨을 불어 넣어주는 숨은 <말숨>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사이의 간격을 없애려는 것이 평등이며 거기에서는 인권을 중시하게 된다. 사람-사이에 있음이 무너지게 되면 도덕, 윤리가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③ 시간은 <때-사이에 있음>이다.  기억이 과거의 것에 주로 머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때-사이의 가장 전형적인 행위를 <생각>이라 말하며 거기에서 반성적인 측면을 부각시킨다.  때-사이는 역사, 학문, 지평, 엄격한 의미의 역사의식이 생겨나는 곳이다.  인간은 찰나적인 존재가 아니라 순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전체를 내다 볼 수 있다.  하루살이에게 내일이란 없다. 동물은 생존적인 시간만을 몸으로 살다가 죽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앞을 내다보고 뒤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이다.  역사의 발견은 바로 때의 발견이라 할 수 있다. 어느 과학자가 지적하는 것을 따르면 지구가 생태학적으로 동물적인 삶을 사는 인류를 수용할 수 있는 적정 한계 인구수는 400만 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문명이 발달하고 역사의식, 곧 반성적인 차원이 생겨나면서 인류의 숫자는 기하학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원 원년 경에는 대략 1억이었던 인구가 기원 1,000년에는 3억 5천만이었다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00년에 16억이 되었다. 지난 일백 년 동안에는 무려 지난 1,000년 간 늘어났던 인구수의 세배로 늘어서 60억이라는 수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에게는 땅의 문제와 동시에 인구의 문제가 중요하게 제기되는 것이다.  땅의 문제와 인구의 문제가 어떻게 해소될 수 있는가에 따라 미래 인류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이에 있는 존재로서 인간이 이 문제를 해결해내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 때, 역사, 문명 등인데, 이는 인간이 시간적인 존재로서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과거의 전통을 세우고 현재가 과거에 의해 새롭게 의미부여 받도록 하며, 더 나아가 미래에 대한 시각을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간적으로 뻗쳐 있는 인간은 그 뻗쳐있음으로 인해 환한 밝음의 장소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즉 땅의 공간 뿐 아니라 시간의 공간이 얼마나 넓은가에 따라서 인류의 문명이 얼마나 발달했는가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주의 시작에서부터 우주의 종말까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런 사이들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는 천지간(天地間), 곧 <하늘과 땅-사이>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때-사이로서의 인간에 관한 것을 보면, 사람은 제각기의 나, 곧 <제나>인데, 이 제나는 맘나와 몸나가 통합된 개념이다.  여기에서는 <주체>의 의미가 들어가게 된다.  주체의 의미는 과거의 나의 정체성을 가지고 그것이 미래의 나에게 어떤 영향력을 펼칠런지를 염두에 두면서 현재의 나를 살아가는 것이다.  주체성이라는 것은 시간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역사성과는 뗄 수 없는 관련이 있다.  때-사이에서의 숨의 차원을 이야기한다면, 말로는 때를 못 잡기에, 여기에서는 <글숨>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④ 천지간(天地間), <하늘과 땅-사이>에서 하늘은 우주적 하늘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신적인 하늘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우주적인 사이에 있음을 책임져야 할 뿐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사이도 책임을 져야 한다.  문제는 서구적인 생각이 근대화 · 세속화 되면서 이러한 차원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는 데에 있다.  즉 인간에게 기도, 감사, 초월, 성스러움, 신, 종교 등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 차원이 무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건 여기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영성이고, 얼로서의 나인 <얼나>가 나의 참 모습이며 이 얼나가 모든 것을 통합하면서 우주(하늘)와 하나가 된다는 점이다.  그 모든 것의 통합은 하느님과 하느님이 만들어놓은 이 우주가 하나가 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 통합된 숨을 쉬는 것이 <얼숨>이다.  또는 우주의 숨이라 해서 <우숨>이라고도 한다.  우숨이 우주와 조화가 될 때, 우주와 하나가 될 때 그때 바로 그 우숨이 <참숨>이 된다.  

이렇게 때-사이에 있음이 곧 주체성이고 빔-사이에 있음이 철학함의 공간성이며 사람-사이에 있음이 철학함의 역사성, 하늘과 땅-사이에 있음은 보편성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연결시키는 것이 반드시 서로 맞아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사이에-있음이 이 땅에서 철학하기의 네 가지 커다란 축임을 염두에 두기로 한다. 첫 번째 차원인 철학함의 주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다.  말, 곧 언어에 의해서 이성, 문화, 진리들이 밝혀지는 것이기에 언어가 철학하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말로 철학하기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즉 자신의 말을 가지고 스스로 사유하고 인식하고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근대화란 바로 이 사유의 자율성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두 번째 차원인 철학함의 공간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인간은 자기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존재자이다.  자기의 집에서부터 출발하여 그 집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가며 그 자기의 공간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존재자이다. 즉 인간이란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내던져져 있으면서 자기가 속해 있는 세계를 떠맡아 바꾸어 나가는 존재자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성이란 수용-학습-발전-전달을 포용하는 개념이다.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유산을 어떻게 수용하는가 하는 문제와 어떻게 더 발전시켜 나가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주체성이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계기는 사회, 언어, 노동의 차원에서 나타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남과 더불어 언어를 가지고 자기 주변, 곧 삶의 공간을 일구어 나간다는 것이다.  이것들(사회, 언어, 노동)이 세계형성에서 대상을 만들어내는 범주이다.  

세 번째로 인식론적 차원에서는 한 사회에서 통용되고 그 사회에 맞는 패러다임과 에피스테메 라는 틀이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이해의 지평>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즉 컴퓨터를 컴퓨터로 인식한다는 것은 우리의 이해의 지평 속에 이미 컴퓨터가 컴퓨터로서 의미부여되어서 이해되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우리와 이해의 지평이 다르기 때문에 컴퓨터를 컴퓨터로 알아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이해의 지평이 다름으로써 세계와 문화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넓어져 가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19세기에는 서구의 문명을 맞으면서 혼란을 겪게 되었지만 지난 100년간 우리는 우리의 이해의 지평에 대해 우리 스스로의 반성이 없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이해의 지평을 나 스스로가 제대로 알아야만 하는 것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나는 남의 이해의 지평을 따라 사용하고 행동할 뿐이고 따라서 스스로 반성하여 주체적으로 자신을 정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주체적인 그리고 필연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세계화 시대에 달라진 삶의 세계, 생활세계의 달라진 이해의 지평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연구와 정리가 이전의 종적인 차원에 그쳐서는 안 되고 한 단계 더 나아가 횡적인 차원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횡적 차원에서 추구되는 이해의 지평을 우리는 <가로지르기>라고 이름할 수 있다.  이것이 네 번째 차원인 철학함의 보편성의 차원이다.  “이 땅에서 철학하기”라는 철학함의 주체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이야기한 네 가지 차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 하이데거 철학 연구를 위한 추천도서 목록 *

1. 마르틴 하이데거,『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1998.
2. ---, 『현상학의 근본문제들』, 이기상 옮김, 문예출판사, 1994.
3. ---,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세계―유한성―고독』, 이기상 옮김, 까치, 2001
4. ---, 『논리학. 진리란 무엇인가』, 이기상 옮김, 까치, 2000
5. ---,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독한대역본, 이기상 옮김, 서광사, 1995.
6. ---, 『기술과 전향』, 독한대역본, 이기상 옮김, 서광사, 1993.
7. ---, 『세계상의 시대』, 독한대역본, 최상욱 옮김, 서광사, 1995.
8. ---, 『니체와 니힐리즘』, 박찬국 옮김, 지성의 샘, 1996.
9. ---, 『셸링』, 최상욱 옮김, 동문선, 1996.
10. ---, 『동일성과 차이』, 신상희 옮김, 민음사, 2000
11. ---. 『진리의 본질에 관하여.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 테아이테토스』, 이기상 옮김,    까치, 2004.
12. 이기상, 『하이데거의 실존과 언어』, 문예출판사, 1991.
13. ---, 『하이데거의 존재와 현상』, 문예출판사, 1992.
14. ---, 하이데거 사상강좌『존재의 바람, 사람의 길』, 철학과 현실사, 1999.
15. ---, 『하이데거의 존재사건학』, 서광사, 2003.
16. 이기상(편저), 『하이데거 철학에의 안내』, 서광사, 1992.
17. 오토 페겔러, 『하이데거 사유의 길』, 이기상/이말숙 옮김, 문예출판사, 1993.
18. 한스 페터 헴펠, 『하이데거와 禪』, 이기상/추기연 옮김, 민음사, 1995.
19. F.-W. 폰 헤르만,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이기상/강태성 옮김, 문예출판사, 1997.
20. ---,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찾아서』, 신상희 옮김, 한길사, 1997.
21. G. 스타이너, 『하이데거』, 임규정 옮김, 지성의 샘, 1996.
22. 마이클 겔븐, 『존재와 시간 입문서』, 김성룡 옮김, 시간과 공간사, 1991.
23. 발터 비멜, 『하이데거』, 신상희 옮김, 한길로로로, 1997.
24. 이기상/구연상, 『<존재와 시간> 용어해설』, 까치, 1998.
25. 박찬국, 『하이데거와 나치즘』, 문예출판사 2001.
26. ---, 『하이데거와 윤리학』, 철학과 현실사, 2002.
27. 이수정/박찬국, 『하이데거. 그의 생애와 사상』, 서울대출판부, 1999.
28. 리하르트 비서, 『하이데거. 사유의 도상에서』, 강학순/김재철 옮김, 철학과 현실사, 2000
29. 신상희, 『시간과 존재의 빛』, 한길사, 2000
30. 한국하이데거학회 편, 『하이데거의 존재사유』, 철학과 현실사, 1995.
31. ---, 『하이데거의 철학세계』, 철학과 현실사, 1997.
32. ---, 『하이데거의 언어사상』, 철학과 현실사, 1998.
33. ---, 『하이데거와 근대성』, 철학과 현실사, 1999.
34. ---, 『하이데거 철학과 동양사상』, 철학과 현실사, 2001
35. ---,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철학과 현실사, 2002

 

이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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