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는 도학의 리학 일파의 가장 위대한 인물인데, 주자와 같은 시대에 도학에서 심학 일파를 세운 사람이 육상산이다. 양간은 「상산선생행장」에서 말했다.
선생의 성은 육, 휘는 구연, 자는 자정이다. .... 타고난 기품이 범상했는데 장중하나 자랑하는 기색이 없었다. ....어린시절에 사람들이 암송하는 이천의 말에 '그 자신이 손상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천의 말은 왜 그렇게 공자, 맹자와는 종류가 다른가?"라고 반문했다. 또 『논어』를 처음 읽었을 때 유자의 말이 지리멸렬함을 느꼈다.... 그후 옛 책을 읽다가 '우주'라는 두 글자를 풀이한, "사방과 상하가 宇이고 고대부터 현재까지가 宙이다."는 대목에서 홀연히 크게 깨닫고 "우주 안의 일은 곧 내 본분 안의 일이고, 내 본분 안의 일은 곧 우주 안의 일이다"고 말했다. 또 "우주는 곧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은 곧 우주다"고 말했다.
동해에 성인이 나와도 이 마음과 그 이치는 같고, 서해에 성인이 나와도 이 마음과 그 이치는 같고, 남해와 북해에 성인이 나와도 이 마음과 그 이치는 같고, 천백세대 앞에 나온 성인도 이 마음과 그 이치는 같으며, 천백세대 후에 성인이 나와도 이 마음과 그 이치는 같다.
「행장」에 따르면 상산은 무주 금계 사람이고 송나라 고종 소흥 9년에 태어나 광종 소희 3년에 돌아갔다.상산은 어려서부터 이천의 말이 "그 자신을 손상시키는 것 같다"고 느꼈다. 상산의 학은 이천과는 다르지만 명도와는 아주 가까웠다. 명도는 「식인편」에서 "배우는 자는 먼저 仁을 인식해야 하며", "그 理를 인식하고 誠, 敬으로 보존하면" 만사 그만이라고 여겼는데, 상산의 설이 바로 그런 의미다. 상산은 말했다.
요전에 누가 내 학문을 비방하며 "먼저 대체를 확립한다는 한 구절을 제외하면 아무 내용도 없다"고 하자, 나는 "정말로 그렇다"고 대꾸했다.
이른바 "먼저 대체를 확립한다" 함은 도가 곧 내 마음이요 내 마음이 곧 도이며 "도 밖의 일이 없고 일 밖의 도가 없음"을 먼저 인식한다는 말인데, "배우는 자는 먼저 仁을 인식해야 한다"는 명도의 말과 같다. 상산은 말했다.
만물은 마음 속에 빽빽하게 들어 있다. 마음을 가득 채우고 발현하여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 가운데 저 理 아닌 것이 없다.
맹자는 말하기를 "자기 마음을 다 발휘하면 그 본성을 알고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안다"고 했는데 마음은 오직 한마음이다. 내 마음이 내 친구의 마음이고, 위로 천백년 이전 성현의 마음이고 또 아래로 천백년 이후 성현도 이 마음은 오직 이럴 뿐이다. 마음의 본체는 매우 크니, 만약 내 마음을 다 발휘할 수 있으면 하늘과 같아진다. 학문이란 단지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理가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으니 "道 밖의 일이 없고 일 밖의 道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을 접어두고 따로 헤아리고 따로 나아가고 규모를 이루고 따로 모습을 이루고 따로 일을 하고 따로 공을 세운다면 道와 아무 관련이 없으니 이단이고 탐욕이다. 즉 탐닉이고 선입견의 울타리이니 그런 논설이 사설이고 그런 견해가 사견이다.
道는 천하에 충만해 있고 작은 틈도 없다. 사단을 비롯한 모든 선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니 우리가 억지로 꾸밀 필요가 없다. 다만 우리 스스로 병집을 가지기 때문에 그것과 격리되었을 따름이다.
우리의 마음은 본디 우주의 전체이나, 다만 보통 사람은 늘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상산은 말했다.
道는 우주에 충만해 있으니 道로부터 숨거나 피할 곳은 없다. 道는 하늘의 경우는 음양, 땅의 경우는 강유, 사람의 경우는 인의이다. 따라서 인의는 사람의 본심이다. ....우매하고 불초한 자는 미치지 못해서 물욕에 치우쳐 그 본심을 상실하고 또 잘나고 똑똑한 자는 지나쳐서 자기 소견에 치우쳐 그 본심을 상실한다.
즉 상산이 말한 "우주가 사람을 격리시킨 적이 없고 사람 스스로 우주를 격리시켰다"는 뜻이다. 우리가 학문하는 까닭은 마음의 편견을 제거하고 그 본체를 회복하려는 것이다. 상산은 말했다.
이 理가 우주에 존재함에 무슨 장애가 있으랴마는 네 스스로 침몰하여 스스로 몽매한 편견에 갇혀 부지불식간에 함정 속에 빠져들어 이른바 고원한 존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지 못하게 된 것이니, 이제 그 함정을 완전히 돌파하고 올가미를 끊을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오직 이것만이 학문이고 이 외에 다시 학문은 없다. 상산은 말했다.
『논어』에는 맥락이 애매한 말들이 많다. 예컨대 "지혜는 미치지만 그것을 견지할 어진 덕성이 없다"고 했는데 무엇을 견지한다는 말인지 알 수 없고, "배우고 늘 익힌다"고 했는데 무엇을 늘 익힌다는 말인지 알 수 없다. 학문에 본령이 없으면 쉽게 해독할 수 없는 말들이다. 학문에 본령이 있으면 지혜가 미치는 대상도 그것이고 어진 덕성이 견지하는 대상도 그것이고 늘 익히는 대상도 그것이고 기뻐하는 대상도 그것이고 즐거워하는 대상도 그것이니 마치 높은 옥상에 물병을 거꾸로 매단 것처럼 쉬워진다. 그런 즉 학문의 근본을 알면 육경은 모두 나의 주석에 불과하다.
'격물'이란 이것을 탐구하는 것이다. 복희가 천문과 지리를 관찰한 것도 역시 먼저 이것에 전력했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른바 '격물'도 말단에 불과하다.
"배우고 늘 익힌다"고 했는데, 먼저 무엇을 익힐지 알아야 한다. 무엇을 익힐지 알려면 "먼저 그 대체를 확립해야" 하고 먼저 "근본을 알아야" 한다. 이미 "근본을 알았으면" 그것에 힘을 쏟고 그것을 늘 읽히고 그것을 견지하고 그것을 즐거워하면 모든 공부는 다 "마치 높은 옥상에 물병을 거꾸로 매단 것처럼 쉬워진다."먼저 이 마음을 알았으면 그저 스스로 그러하게 맡겨두기만 하면 이 마음은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사물에 응한다. 상산은 말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스스로 주재력을 발휘하면, 만물은 다 내게 구비되어 있으니 무슨 부족함이 있겠는가? 측은해야 할 때 자연히 측은해하고, 부끄러워하고 미워해야 할 때 자연히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며 관대하고 온화해야 할 때 자연히 관대하고 온화하며 과감하고 의로워야 할 때 자연히 과감하고 의롭게 된다.
『시』에 문왕은 "부지불식간에 하는님의 법칙을 따랐다"고 찬양했는데, 요 임금을 찬양한 강구의 노래도 비슷하다. 『논어』에서 순 임금, 우 임금을 찬양하여 "위대하다! 천하를 소유했지만 간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람이 간여하는 과오를 인식하고 아는 체하는 병을 없앨 수 있다면 이 마음은 밝아지고 이 理는 확장되어 사물은 서로 부응하여 "인식은 늘 법도에 맞고 취지는 늘 증정의 도리에 부합한다." "성인이 지나가는 곳은 감화되고 머무르는 곳은 신비해져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에서 다 같이 유전하니 어찌 소소한 도움에 불과하리오?"
이것은 앞에서 인용한 「조감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 "자기 소련에 치우쳐 그 본심을 상실한" 경우를 풀이한 것으로 명도의 「정성서」의 의미와 같다. 여기선 "이기심과 셈속"이 없으면 우리의 마음은 "확연대공하여 사물이 도래할 때 순응한다"고 했다. 상산이 여기서 말한 "간여하는 과오"가 바로 "이기심"이고, "아는 체하는 병"이 바로 "셈속"이다. 이른바 "이 마음이 밝아지고 이 理가 확장되어 사물이 서로 부응한다"고 함은 즐거워할 만한 사물을 보면 자연히 즐거워하고 분노할 만한 사물을 보면 자연히 분노하는, 즉 "확연대공하여 사물이 도래할 때 순응한다"는 말이다. 불교의 병폐는 바로 "크게 공적이지" 못한 데 있다. 상산은 말했다.
나는 일찍이 "義와 利" 두 글자로 유교와 불교를 구분한 적이 있다. 公과 私의 구분은 사실은 義와 利의 구분이다.
유자들에 따르면 우주에서 인간의 생명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천지와 더불어 삼극이 되는데, 하늘에는 하늘의 道, 땅에는 땅의 道, 사람에겐 사람의 道가 있으니, 사람이 사람의 道를 다 발휘하지 못하면 천지와 나란히 존립할 수 없다. 사람의 오관은 각각 그 직무가 있어서 시비와 득실이 생기고 나아가 교육과 학문이 생긴다. 유가의 가르침이 수립된 근거가 이러하므로 유가는 의롭고 공적이다.
반면 불교는 사람이 세상에 나서 생사와 윤회와 번뇌가 있음을 심대한 고통으로 여겨 그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모색한다. ....그래서 그들은 "생사의 문제가 중대하다"고 말한다. .....불교의 가르침이 수립된 근거가 이러하므로 불교은 이기적이고 사적이다.
유교는 의롭고 공적이므로 세상을 경영하나 불교는 이기적이고 사적이므로 세상에서 도피한다. 유교는 소리도 냄새도 없으며 방향도 형체도 없는 형이상의 경지를 논해도 항상 세상의 경영을 주장하나, 불교는 미래에 모든 사라믈 구제한다고 논의하고 있어도 결국은 세상으로부터 도피할 것을 주장한다.
즉 '세상 경영'과 '세상 도피'로써 유교와 불교를 분별했다. 세상경영은 우리 마음의 자연에 따른 것이고 세상 도피는 "이기심과 셈속"의 결과이다. 상산은 자기의 수양방법 역시 주자와 다르다고 여겼다. 상산의 어록은 말한다.
한 제자가 "정부가 옛 습관은 없애기 쉽지 않지만 하나를 없애면 모든 것을 없앨 수 있다고 말해 제가 주자의 방법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일러주었습니다"라고 말하자 상산은 말했다.
"그 문제는 주자에 견줄 수 없다. 그저 짐을 가증시킬 뿐이다."
성인의 말씀은 그 자체로 명백하다. 예컨대 "너희는 집에서 효도하고 밖에선 공손해야 한다"는 구절은 너희가 집에서는 효도하고 밖에서는 공손해야 함을 분명히 말한 것이니, 무슨 주석이 필요하겠는가? 주석으로 학생들의 정신을 피로하게 하면 그들의 짐이 점점 무거워진다. 만약 그들이 내게 오면 나는 그저 그들의 짐을 덜어준다. 그것이 격물이다.
『노자』는 "학문의 추구는 끊임없이 덧붙이는 것이고 道의 추구는 끊임없이 떨쳐내는 것이다"고 했는데 상산은 그 관점에서 주자학과 자신의 학을 구별했다. 그래서 "아호의 만남"에서 상산은 주자와 논쟁하면서 시를 지어 "간이한 공부는 결국 장구하고 위대해지지만 지리한 학업은 끝내 부침할 뿐이다"고 말했다. '지리'는 주자의 학을, '간이'는 상산의 학을 지칭한 말이다.
참고 : 중국철학사 / 펑우란 / 박성규 옮김 / 육상산
눈에비친햇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