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1762-1836)/정약용

다산의 목민정신과 그 교육방안

눈에비친햇빛 2011. 6. 23.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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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머릿글 

교육의 가치를 수단적이나 외재적으로 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결코 충분하지는 않다. Bernstein(1978: 198)이 Habermas의 '해방적 인식관심'을 검토하는데서 확인이 되듯이, 우리가 추구하는 문화와 기술의 함축된 의미가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의사소통과 소외되지 않은 노동이라는 해방을 위한 조건을 마련하는 데 있다고 볼 때,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는 교육이야말로 그 자체로서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교육은 내재적 가치를 갖는다.   다산(茶山)1>

또한 이러한 교육의 내재적 가치를 확신하고 있다. 정치·경제·행정·형법 등의 존재이유가 다름 아닌 교육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힌 그의 진술은 이 확신을 뒷받침해 준다. "백성을 다스리는 직분은 국민을 교육하는 일일 따름이다. 전산(田産)을 고르게 하는 것도 앞으로 국민을 교육하기 위함이요, 부세와 요역을 고르게 하는 것도 앞으로 국민을 교육하기 위함이요, 고을을 설치하고 수령을 두는 것도 앞으로 국민을 교육하기 위함이요, 형벌을 밝히고 법규를 갖추는 것도 앞으로 국민을 교육하기 위해서이다"(전서, 5-7;42b, 목민심서).2>
이러한 그의 신념으로부터 교육적 가치에 대한 건전한 안목을 확인할 수 있는 동시에 공직자의 교육적 과업을 요청한 그의 높은 민권의식을 엿볼 수도 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신한국' 창조의 바람이 일고 있다. 특히 새로운 공직자상을 세워야 한다는 국민적 바램이 그 어느 때 보다도 크다. 논자는 다산으로부터 올바른 방향과 그 교육적 실천방안에 관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다산에 따르면, 여기서 신한국의 창조에서 '새롭다'는 新의 실질적 의미는 '친하다'는 親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공직자는 효도·우애·자애의 인륜을 스스로 실천하고 가르침으로써 사람마다 친(화목)하게 만드는 데 일차적 비중을 두어야 한다. 그는 교육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하였다. 백성이 서로 친애하는 것이야말로 백성이 새롭게 되는 것이라는 다산의 주장은 오늘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근본적인 교육원리이다. 현재와 똑같은 상황에서는 아니지만 그는 당시의 민생문제를 해결하려는 절실한 뜻으로 교육적 처방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심서」 등 이른바 '일표이서'를 저술한 동기이기도 하다. 특히「목민심서」는 목민관의 정신과 자세가 무엇인지를 말해줌으로써 우리의 현실적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는데 적잖은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 논문은 다산의 목민정신을 밝히고 이와 관련된 그의 교육방안을 살펴보고자 한다. 논자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물음에 대답을 찾아가는 접근으로써 이 연구의 목적에 도달하고자 한다. 첫째로 목민철학의 토대로서 다산의 인간이해가 보여주는 특징은 무엇인가? 둘째로 '수기목민'이라는 다산의 교육이념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셋째로 교육내용으로서 다산이 제시한 것은 무엇인가? 넷째로 다산의 교육방법은 어떤 특색을 갖는가?

주 1) 정인보는 유형원(1622-1673)을 실학의 1조(祖)로, 이익(1681-1763)을 2조로, 정약용(1762 - 1836)을 3조로 규정한 바 있다(이문원, 1983: 76). 정약용은 윤리와 경제, 내실과 외실, 正德과 이용후생, 수기와 치인, 도(道)와 기(器)를 새로운 차원에서 통합하려 하였다(김영호, 1977: 457) '다산(茶山)'은 실학을 집대성한 실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정약용(영조 38년 - 헌종 2년)이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즐겨 쓰던 호를 가리킨다. 이 밖에도 그의 호에는 삼미자(三眉子), 열수, 열상노인, 의암(俟菴), 별초(別樵), 택옹, 태수자하도인(苔臾紫霞道人), 태상조수(苔上釣臾), 철산인마(鐵山人馬) 등이 있고, 당호는 여유당(與猶堂), 아명은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 송보(頌甫), 시호는 문도(文度)이며, 약용(若鏞)은 그의 관명이다. 
주 2) 영인본『여유당전서』(경인문화사, 1982)에서 제 5집 제 7권 제 42장의「목민심서」를 가리킨다. 앞으로의 표기법 또한 이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Ⅱ. 목민철학의 구조 
  

다산철학의 초점은 인간문제이다. 다산학은 인간학적 실천윤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래서 '수기치인의 인간학'(이을호, 1975: 217)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이규정을 반성적으로 검토한 이남영은 여기서 수기치인이기 보다는 '수기목민'(한우근, 1985: 163)이란 개념이 보다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 또한 재검토되어야 할 문제를 지니고 있지만, 우선 다산사상을 보다 특징적으로 나타낸 표현으로 인정될 수 있다. 목민철학의 구조를 밝히고자 Ⅱ 장에서는 먼저 다산이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 이어서 수기목민의 교육이념을 다루고자 한다. 
 

⑴ 인간학적 토대 
다산의 인간관은 여러 각도에서 조명될 수 있다. 대체로 이것은 '탈성리학적 관점'(윤사순, 1985: 140)에서 파악됨이 적절하다. 탈성리학적 실학의 관점으로 모아진 다산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구체적으로 세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로 인간은 자연과 구분되는 영장이다. 둘째로 인간의 본성은 기호로서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한다. 셋째로 인간은 마음의 자주권을 가진 선악의 주체이다. 
 

 1) 자연과 구분되는 인간: 다산의 인간관에서는 성리학적 관점과 달리 자연과 인간의 이분법이 두드러진다. 성리학은 인간을 형이상학적 관념을 통하여 해석함으로써 보다 근원적이고 합리적인 의미를 제공해왔다. 다산은 성리학의 문제의식이 인간의 본성과 그 근원을 탐구하는 데 있음을 높이 평가하고 주희(朱熹)가 유학을 중흥시킨 인물임을 긍정한다(전서, 2-12;2a, 논어고금주).  그러나 성리학은 생동하는 인간존재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본질을 해명하려는 과정에서 성리학은 인간과 우주와 만물을 하나의 원리 안에 일치시킨다. 그러나 인간이 태극·음양의 이기론으로 분석되었을 경우, 인간의 고유성은 간과될 수 있다. 다산은 이기론의 논쟁이 그동안 사변적 형식주의에 빠져 아무런 창조적 사고를 하지 못한 것으로 단정짓는다. 사실 그는 주희가 중용의 '명·성·도·교(命·性·道·敎)' 에 대해 천인합일을 전제로 한 인간과 사물을 겸한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불만이다. 왜냐하면 '천명의 성은 인성(人性)이고, 솔성의 도는 인도(人道)이며, 수도의 교는 인교(人敎)'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전서, 2-4;4a, 중용강의).  다산은 자연과의 일체의식보다 오히려 자연과의 이분의식을 지녔다. 이런 견지에서 그는 이른바 '성삼품설'을 제시한다. 성에는 인간의 성과 다른 동물 및 식물의 性이 있는데, 이들은 각기 상중하의 질적 차이가 있다. 결국 상품의 성을 지닌 인간이 식물은 물론 타동물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이들 가운데서 가장 우월한 존재라는 생각이다. 


성(性)에는 세 가지 품질이 있다. 초목의 성(性)은 생(生)은 있으나 당(黨)이 없고, 금수의 성은 생뿐만 아니라 당도 있으며, 인간의 성에는 생과 당에다 또 영(靈)과 선(善)까지 있다. 상중하의 3급이 결코 같지 않다(위의 책, 2-4: 47a).  인간과 다른 동물의 차이는 곧 '영과 선'의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에 달렸다. 인간에는 '영과 선'이 있는 반면, 동물에는 이것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과 선'은 타 동물에 비교된 인간의 우월성, 즉 인간을 영장시하는 근거이다(한우근, 1985: 151). 이러한 다산의 영장관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킴은 물론 인간의 입장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자세를 일단 확립하고자 하는 그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이같은 자세에는 자연과의 합일하려는 성리학적 태도와 달리 자연과 대립하여 그것을 응용하려는 의식이 깔려 있다. 영장으로 간주되는 근거가 인간이 단지 금수와 달리 도덕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는데 놓여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도덕적 능력과 더불어 영장으로서 또 다른 근거인 지적 탁월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지적인 능력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생활에서 적용하는 기예에서 발견된다. 


 하늘이 날짐승과 길짐승에게 발톱을 주고 뿔을 주고 단단한 발굽과 날카로운 이빨을 주고 독을 주어서 제각기 갖고자 하는 것을 얻게 하였다. …… 어찌하여 하늘은 천한 금수한테는 후하게 하고 귀하게 대하여야 할 인간에게 박하게 하였는가. 그것은 인간에게는 지혜로운 생각과 교묘한 궁리가 있으므로 기예를 익혀서 제 힘으로 살아가도록 한 것이다(전서, 1-11: 10b, 기예론).   이와 같이 기예의 사용유무는 인간과 짐승의 차이가 된다. 인간의 탁월성은 근본적으로 기예를 발명하고 적용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시하는 주요 근거는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다. 다산은 기예를 통한 사회의 진보를 믿는다. "그러한 까닭에 사람이 모일수록 그 기예는 정밀하게 되고, 시대가 지날 수록 그 기예는 교묘해진다"(위의 책).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그는 자연과의 이분의식을 바탕으로 기술개발까지 도모하였음이 분명하다. 
 

2) 기호로서의 인성: 이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다산의 논리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도 또한 이·기·심·성·정(理·氣·心·性·情) 등 성리학의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다산은 이 용어들의 의미를 이전과 달리하여 독자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성리학자들에 있어서 성은 곧 리(理)이다. 여기서 다산은 리의 실재성을 거부하고 성을 형이상학적 실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인성에 대한 다산의 견해는 대단히 독특하다. 그는 인성을 심(心)의 기호로 규정한다. 이른바 '성기호설'이 그것이다. 자신의 학문적 연구들 가운데서도 특히 성이 기호임을 알아낸 성과를 두고 다산은 스스로 만족하다고 밝힌 바 있다(전서, 1-16: 16a, 자찬묘지명). 성이 기호로서 지닌 의미를 그는 욕·낙·성의 관계를 통하여 보여준다. 즉 欲은 낙보다 얕고 가까우며 낙(樂)이 그 다음이고 성이 가장 깊은 것이지만, 성은 두 가지와 마찬가지로 기호에 속한다(전서, 2-6: 42b, 맹자요의). 
  

그런데 성을 기호로 간주하는 다산의 인간관은 순자의 인성론을 연상시킨다. 순자에 따르면, 인성은 타고난 것으로서 '눈이 아름다운 빛을 좋아하고 귀가 아름다운 소리를 좋아하고 입이 좋은 맛을 좋아하고 마음이 이익을 좋아하고 육체가 안일을 좋아함과 같은 것'(순자, 성악2)으로 기질의 성만을 말한다. 
 

다산은 성을 기호(욕구)로 파악하기 때문에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을 그다지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그도 성을 '영지의 기호'(도의성)와 '형구의 기호'(기질성)로 일단 분별하기지만, 이 두 가지를 성리학에서만큼 뚜렷이 분리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이 묘합하여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다산은 주장한다(전서, 2-15: 11a-14a, 논어고금주). 성이 기호임을 전제로 하여 본연과 기질의 성을 엄밀하게 구별짓지 않는 태도는 곧 그만큼 기질의 측면을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성리학자들보다 다산이 현실적이고 경험적인 사고의 특색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것은 재(才)이며, 선하기 어렵고 악하기 쉬운 것은 세(勢)이며, 선을 즐겨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성(性)이니, 이러한 성을 따라 어김이 없으면 도(道)에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성은 선하다는 것이다(전서, 1-16: 17b, 자찬묘지명).   여기서 기호로서의 인성은 선한 것으로 제시된다. 이것은 다산이 분명히 맹자의 성선설을 지지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사실 맹자의 성론에 기질지성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비난을 다시 비판하면서, 다산은 맹자가 성을 천명으로 주어진 선한 것으로 본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전서, 1-8: 32a, 맹자책). 이와 같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성질은 이성적이라기 보다는 먼저 감정적이라는 점에서 다산은 인간의 감성적인 면을 중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다산의 성관은 맹자와 순자 중간 정도에 든 자연성의 특징을 보여준다. 따라서 다산의 이러한 성기호설에 입각할 때 인간은 어느 정도 이기적인 욕구체로 자리 매김이 된다. 이 점은 다산의 관점이 성리학에서 크게 벗어나 있임을 가리킨다. 

 

 3) 선악의 주체로서의 마음: 인간의 마음에 관한 다산의 견해를 살펴본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란 정신과 신체가 오묘하게 결합된 존재이다. 이렇게 결합된 전체적인 모습을 다산은 몸(身 또는 己)이라 하고, 그 정신적 측면을 가리켜서 마음(心) 또는 영혼이라고 한다. 다산은 정신과 신체를 분리시킬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과 몸을 바르게 하는 것이 별개의 공부가 될 수 없다고 밝혔다(전서, 2-1: 29a, 대학공의). 마음은 그 활동이 신묘하고 살아 있는 인간 존재의 생명이다. 생명력으로서 마음은 성리학적 리(理)나 기(氣)의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다. 
  

다산의 분석에 따르면, 마음은 세 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는 오장 가운데 하나인 '심장'이다. 이것은 피를 순환시켜 신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둘째로 '영명(靈明)한 마음'이고 셋째는 그것이 '발휘되어 나타난 마음'이다(전서, 1-19: 30b, 답이여홍). 그런데 이들 두 번째와 세 번째의 형태에서 인간의 마음이 가진 고유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영명한 마음이 마음의 본체라면, 발휘되어 나타난 마음은 그 작용이다. 다시 말해서 발휘되어 나타난 마음은 다양하지만, 그 본체는 영명하고 허령한 마음 하나뿐이다. 인간의 영명한 마음은 어떤 초월적 실재거나 형이상학적 실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체적이고 동물적인 물질도 아니다. 오직 인간의 고유한 생명적인 실체이다(금장태, 1980: 10). 인간의 마음은 선과 악을 행하는 주체로 파악된다. 다산은 이러한 마음의 자주권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의 고유성과 도덕적 근거임을 확신한다. 


하늘은 인간에 대하여 자주권을 이미 마련해 줌으로써, 그가 선하고자 하면 선을 실제로 행하고 악하고자 하면 악을 실제로 행하게 하였다. …… 그러므로 선을 행하는 것은 사실 자신의 공이 되고, 악을 행하는 것도 자신의 죄가 된다. 이것은 마음의 권능이다(전서, 2- 5: 34b-35a, 맹자요의).   언제나 인간은 마음의 작용이 나타날 수 있는 두 가지 양상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이 양상은 흔히 인심(人心)과 도심(道心)3> 또는 대체(大體)와 소체(小體)4>로 표현된다. 도심은 항상 대체를 기르고자 하나 인심은 항상 사욕을 기르고자 한다. 다산은 도심과 대체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지만, 도심과 인심의 대립이 있는 인간의 현실을 주목한다(전서, 2-12: 2ab, 논어고금주). 인간의 마음은 '갈등하는 싸움터'로 규정된다. 다산은 삶의 현실 속에서 결단과 행동을 요구하는 자율적 인간관을 제시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란 본능에 따라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마음의 자주권을 행사하는 선택적이고 결단적인 행동을 하는 존재이다. 그는 자유의지론을 긍정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다산에 의해 체계화된 인간이란 의지자유를 행사하는 개체적 인간이다. 
  

다산 또한 인간의 내면적 도덕성을 함양하고 인간사회의 질서를 구현하거나 성인이 됨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그도 분명히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이념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도덕적 성장이란 인간에 내재한 보편적 본성이 발휘되어 인간의 기질적이고 신체적인 욕구를 지배하게 되는 상태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개체적 감정이나 의지를 억제된다. 다산에 있어서 선이란 인간 본성의 선천적 요인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향한 의지의 결정에 따른 결과이다(금장태, 1980: 8-9). 그는 도덕적 실체가 인간 내면에 선천적으로 부여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행동 속에 그 도덕성을 발휘할 수 있는 미결정적 가능성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산이 인간의 도덕적 근거를 내면적 본질에서 찾는 성리학을 벗어나 있음을 시사한다. 다산은 성은 마음의 속성이지 본질일 수 없다는 전제에서 인·의·예·지가 인간의 내면에 전제되어 있다는 성리학적 신념을 거부한다. 앞서 말했듯이 도덕적 가치는 인간행동의 결과로서 획득되는 것이다(전서, 2-5: 22a, 맹자요의). 성리학은 마음을 통하여 성에로 수렴시키는 내향화를 취하지만, 다산은 마음에서 출발하여 덕을 실천하는 외향화로 나아가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여기서 덕이란 인간에게 선을 좋아하는 직심이 있어 이를 행한 것이다. 덕은 마음에 본래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결과이다(전서, 2-1;8a, 대학공의). 이는 다산이 인간의 내면적 덕에 강조점을 둔 성리학적 접근에서 벗어나 도덕적 실천성을 중시하고 있을 나타낸다. 
주 3) "인심(人心)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심(道心)은 극히 희미한 것이니, 정신을 차리고 오직 하나로 모아 그 중정(中正)을 진실로 잡아라"(『서경』 대우모14). 
주 4) 공도자의 질문에 맹자가 한 대답이다. "대체(大體)를 따르면 대인이 되고, 소체(小體)를 따르면 소인이 된다(『맹자』고자장 상15). 

 

⑵ 수기목민의 이념
앞서 다산의 인간관을 개괄적으로 논의한데 이어 여기서는 그의 교육이념을 중심으로 고찰한다. 다산은 유교적 전통에 따라 자기교육(수기)과 타인교육(목민)의 상보적 방향에서 교육이념을 제시한다. 이 절에서는 첫째로 다산이 목과 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를 알아본다. 둘째로 다산이 제시한 목민관의 책무가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셋째로 수기목민의 윤리적 과제인 효도·우애·자애의 원리를 탐색한다. 

 

1) 목민관과 백성의 관계: 다산은 백성을 다스림(治民)이 백성을 기르는 일(牧民)과 같다고 본다. '치민'이라 할 때 그 다스림은 권위적 의미가 아니라 부모의 섬김에서처럼 임무를 다한다는 뜻이다(금장태, 1980: 164). 이런 의미에서 다산은 치인을 친민 또는 목민으로 표현하고 있다.「목민심서」서문에서는 요순, 문왕, 맹자 등이 남긴 뜻이 바로 목민의 교육정신이라고 주장한다. 다산은 수기의 학이란 학의 반에 불과한 것으로 보아 목민의 학을 강조한다. 


성현의 가르침에는 원래 두 가지 길이 있다. 司徒는 만백성을 가르쳐 각기 수신케 하고, 태학에서는 국자(國子)를 가르쳐 각기 수신하고 치민(治民)케 하였으니, 치민하는 것이 목민(牧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학은 수신이 그 반이요 나머지 반은 목민하는 것이다(전서, 5-16;1a, 목민심서).   다산이 목민의 학을 특히 역설한 현실적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어려움에 처한 국가와 민족에 대한 아픔과 사랑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애민정신은 맹자가 굶주리며 핍박받는 백성의 실정에 대한 정치적 처방으로 왕도정치를 내세운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목자는 양을 굶기지 않고 기름진 초원에서 풀을 골라 먹이듯이, 치자도 인의의 마음으로 백성을 길러야 할 당연한 도리를 갖는다.5>
어떤 점에서 다산이 목민정신의 제시한 것은 당시의 목민관들이 진정한 목민의 도리를 크게 망각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목민관이 백성을 위하여 있는가? 백성이 목민관을 위하여 있는가? 백성은 곡식과 마사(麻絲)를 거두어 그 목민관을 섬기고 수레에 받쳐 영송해 주는데 그 목민관은 백성의 고혈을 빨고 살찌니 백성이 목민관을 위하여 사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목민관은 백성을 위하여 있다(전서, 1-10;4b, 원목).   다산은 이처럼 백성의 존재를 근원적으로 새롭게 인식했다. 목민의 근본이 백성이라는 견지에서 목자는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 이러한 논리는 마침내 국왕(천자) 또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사퇴시키고 다시 선출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이익성: 69). 군주란 하늘이 세운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은 것도 아니고 백성을 위해 그리고 백성에 의해 지위를 부여받았기에 그 존재의의를 잃게 되면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당시의 군주체제 아래서 확고한 신념이 없이는 도저히 내세울 수 없는 급진적인 논리이다. 
  

이 논리는 기본적으로 백성과 다스리는 자가 평등함을 토대로 삼고 있다. 선비란 조정에서는 벼슬을 하는 목민관이지만 가정에 돌아오면 밭을 일구고 고기를 기르며 철따라 채소를 가꾸고 과일을 심으며 살아야 하는 도리를 다해야 한다. 


옛적에 조정에 벼슬한 자는 밭 골 사이에서 출신하지 않은 자가 없다. 요임금 때의 백규는 역산의 농사꾼이었고, 순임금 때의 후직은 유태의 농사꾼이었다. …… 농사일의 고달픔을 직접 경험한 이러한 사람들이 공경과 정승이 되었기에 백성을 잘 다스렸던 것이다(전서, 1-9;10a, 농책).   위의 글에 나타난 사농 일체의 정신은 백성과 목민관이 평등함을 가리킨다. 선비와 농사꾼은 다른 계급이 아니하는 것이다. 사실 다산이 노비철폐 같은 혁신적인 주장을 내세운 바는 없다. 그러나 백성이야말로 목민관의 주인으로 간주한 다산의 인간평등에 대한 의식은 매우 굳건하다. 다음의 상소문은 이런 의식을 보여준다. 


 인재를 얻기 어렵게 된지 오래이다. 온 나라의 인재를 모두 발탁하더라도 부족한 처지인데, 그 열 가운데 여덟·아홉은 버리고 있다. 온 나라의 백성들을 모두 교육하더라도 부족한 처지인데, 그 열 가운데 여덟·아홉은 내버리고 있다. 소민이나 중인이라는 신분으로 하여, 출신이 함경도나 평안도라고 하여, 황해도나 개성이나 강화도라고 하여, 강원도나 전라도라고 하여, 서자출신이다 하여, 북인이다 남인이다 하여 등용하지 않는다. …… 제일 좋은 방법은 동서남북에 구애되지 않고 친소와 귀천의 조건을 떠나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다(전서, 1-9;31b-32a, 통색의).   이것은 인재를 등용하고 교육함에 있어 지역, 친소, 당파, 적서와 귀천의 신분에 따른 차등까지도 타파되어야 한다는 다산의 대담한 주장이다. 그는 진(秦)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은 결국 우민정치로 말미암은 것을 입증하는 사실(史實)까지 들면서 불평등의 요소를 배제하자고 역설한다. 사람들을 특히 교육에 있어서 차등을 받아서는 인된다(전서, 2-10;4b, 논어고금주). 인간은 존비와 귀천을 넘어서 평등하다는 다산의 관점은 주목할 만한 가치를 지닌다. 
 2) 목민관의 책무: 목민관은 백성을 위한 자신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수령이라는 관직은 책임지지 않는 것이 없다는 이유에서 목민관의 임무는 매우 다양하다. 다산은 한 때 이를 여섯 가지 강령으로 제시한 바가 있다(전서, 1-9;32b, 고속의). 이러한 강령에는 농사, 물자, 교육, 형벌, 병무, 공업 등이 포함된다. 
  다산은 다시 목민관의 책무를 여섯 가지 강령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제시하려 했다. 우리 나라의 역사와 사상적 저술과 문집 등 여러 서적에서 옛날의 사목들이 牧民하던 유적을 골라 위아래로 뽑아 정리하며, 종류별로 나누고 모아서 12편으로 된「목민심서」를 저술하기에 이른다. "1편은 부임, 2편은 율기, 3편은 봉공, 4편은 애민이며, 5편에서 10편까지는 육전에 관한 것이고 11편은 진황, 12편은 해관이다. 12편이 각각 6개조로 구성되어 있으니 모두 72개조이다"(전서, 5-16;1b, 목민심서). 그런데 72개조의 제목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부임 6조: 임명받음, 행장준비, 임명인사, 부임행차, 취임, 실무맡기 2. 율기 6조: 반듯한 몸가짐, 맑은 마음, 가정 다스리기, 청탁 물리치기, 씀씀이 아끼기, 즐겁게 베풀기 3. 봉공 6조: 도덕 교화, 준법정신, 예의바른 교제, 공문서 작성, 공물상납, 업무 외 차출 4. 애민 6조: 경로잔치, 어린아이 보살핌, 빈궁한 사람 구제하기, 상을 당한 사람 도와주기, 환자 보살핌, 재난구휼 5. 이전 6조: 아전 단속, 부하통솔, 사람 쓰기, 인재천거, 물정 살핌, 집무 자료 만들기 6. 호전 6조: 농지정책, 세법, 환곡운영, 호적, 공평한 부역, 농사권장 7. 예전 6조: 관청제사, 손님접대, 백성교육, 학문 진작, 서열구분, 과거제도 8. 병전 6조: 병역의무, 군사훈련, 병기관리, 무예권장, 변란대응, 국방 9. 형전 6조: 송사의 심리, 형량결정, 신중한 형벌시행, 죄수보호, 폭력의 제거, 피해제거10. 공전 6조: 산림보호, 수리관리, 관아 건불의 수리, 성곽보수, 도로 닦기, 물품제작11, 진황 6조: 구제물자의 대비, 빈민구제의 권장, 진휼 계획의 수립, 구체적 진휼 방법제시, 민생안정, 상벌과 결산12. 해관 6조: 관직교체, 돌아갈 때의 행장, 고을백성들의 유임청원, 용서의 간청, 순직, 백성들의 사모   6전과 부임 및 해관의 의식절차는 물론이고 율기, 봉공, 애민, 진황 등 「목민심서」의 바탕은 목자의 백성에 대한 사랑과 봉사정신이다. 이러한 애민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목자는 직무적으로 인간적으로 충분히 교육되지 않으면 안 된다. 


군자가 백성을 대함에 마땅히 먼저 나의 성품이 편벽된 곳을 찾아 바로 잡아야 한다. 유약한 것은 강하게 고치고, 게으른 것은 부지런하도록 고치고, 굳센데 치우친 것은 강하게 고치고, 완만한데 치우친 것은 위맹하도록 고쳐야 한다(위의 책, 5-16: 20a).   이와 같이 자기교육에 힘써야 하는 목민관 또는 선비로서의 가치판단의 준거는 무엇인가? 귀양지에서 억울한 유배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조정대신들에게 서찰을 보내기를 간청하는 아들에게 다산은 두 가지 가치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전서, 1-21: 6b, 답련아) 여기에는 시비(是非)의 기준과 이해(利害)의 기준이 있다. 전자는 '정덕'에 관계되고 후자는 '후생'에 관련되는 것이다.6>

 

이것은 다산이 성호의 경세치용과 연암의 이용후생이란 가치기준을 함께 포섭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시비와 이해가 교차하여 ①是와 利, ②是와 害, ③非와 利, ④非와 害의  네 가지 생활모형이 제시될 수 있다.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다산은 '옮음과 이익'(①)의 가치를 최상으로 간주하고 있다. 다산 자신이 유배 받는 현실은 '옳음과 손해'(②)의 모형으로 파악하고, 이러한 현실에서 해배를 받기 위한 권문세가와 교섭은 '그름과 이익'(③)을 추구함이 되고, 이는 결국 선비의 길에서 '그름과 손해'(④)로 낙착되고 말 것임을 분명히 하여 아들의 간청을 거절한다. 이러한 다산의 확신은 그가 삶의 가치를 올바름에 우선을 두고 청빈을 지향하는 선비생활을 가리키는 듯하지만, 그 최선의 삶이 '옳음과 이익'임을 제시함으로써 현실과 민생의 문제를 소중히 하는 실학자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3) 효도·우애·자애의 이념: 다산이 53세 되던 해(1813) 유배지에서 쓴「대학공의」에는 목민교육의 근본원리에 관한 그의 독특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그의 원리는 수기치인의 교육이념을 재구성한 것이다. 다산에 따르면 목민의 교육이념과 실천방안을 가장 잘 밝힌 경전은『대학』이다. 이 책에서는 장차 백성들을 교육(化民)하고자 하는 목민관은 먼저 자기교육(自修)을 해야 하는 이치가 조리 있게 설명되고 있다. 그러면 다산의 목민교육이 지향하는 이념은 무엇인가? 


백성을 가르치되 효도로써 가르치면 백성의 아들 된 사람은 그 아버지에게 친애할 것이다. 백성을 가르치되 우애로써 한다면 아우 된 사람은 그 형에게 친애하고 어린이는 그 어른에게 친애할 것이다. 백성을 가르치되 자애로써 한다면 아비 된 사람은 그 아들에게 친애하고 어른은 그 어린이에게 친애할 것이다(전서, 2-1: 10b, 대학공의).   여기서 보듯이 목민교육의 근본정신은 효도·우애·자애 세 가지이다. 이들 원리들은 인간관계적이다. 이는 개인적 또는 가정적으로 부모, 형제, 자식에 대한 사랑의 실천은 동심원적으로 확장되어 사회적으로 늙은이, 이웃사람, 남의 자식 등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산의 교육원리가 매우 실천적임을 보여준다."효도란 임금을 섬기는 연유가 되는 것이요, 우애(弟)란 어른을 섬기는 연유가 되는 것이요, 자애(慈)란 백성을 다스리는 연유가 되는 것이다"(위의 책, 2-1: 33b). 이 말은 자기 자신이 효도·우애·자애의 길을 가다듬어 그로써 집안과 나라를 통솔한다면, 옳은 행동(덕)을 따로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므로 오직 이 효도·우애·자애의 길만을 미루어 생각하여 사용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효도·우애·자애는 목민관이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덕행인 동시에 자기교육의 실천적 원리이다. 
  

다산에 있어서 효도·우애·자애는 '명덕'을 구체화한 것이다. 명덕이란 인륜에 있어서 최고의 덕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공자가 말한 仁과 같다.7>
그리고 인륜이란 사람과 사람이 서로 접하는 것을 가리킨다(위의 책, 2-1: 13b). 다산은 인을 '사람의 교제'로 파악한다. 따라서 효도·우애·자애란 사람이 서로 교제를 잘 하는 실천적인 활동이다. 이런 견지에서 다산은 명덕, 친민, 지선이 대학의 '3강령'이라는 주희의 설이 그릇되었다고 반박한다. 주희는 단순히 '대학의 길은 명덕을 밝힘에 있고 친민(親民) 있고 지극히 선한 곳(至善)에 그침에 있다'라는 구절을 근거로 3강령을 제시했지만, 다산은『대학』에는 오직 1강령만 있을 뿐이라고 단정한다. 그 이유로는 '친민'이란 효도·우애·자애에 근거를 둔 것이고(같은 책, 2-1:10b), '지선' 또한 인륜 속에 이루어진 지극히 옳은 행동이라는(같은 책, 2-1: 12a) 점에서 변덕밖에는 강령이 따로 존재할 수 없다는데 있다. 다시 말해서 주희가 강령이 세 가지라고 말한 오류는 친민과 지선이 '명덕'에 포함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지 못한 결과라는 지적이다. 다산의 이같은 논증은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 것으로 보여진다. 
  

효도·우애·자애를 3조목이라고 밝힌 데 이어서, 다산은 주희가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이른바 대학의 8조목이고 규정지은 것을  적절하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뒤에서(Ⅲ장 ⑵절의 2)격치와 성정) 살펴보기로 한다. 다산은「대학공의」에서 덕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린다. "마음속에는 본래 덕이란 없는 것이요, 오직 곧은 본성만 있는 것이니, 내가 지닌 곧은 마음씨대로 시행할 수 있는 것을 덕(德)이라 하는 것이다.8>

 

선한 행위를 한 연후에 덕이란 이름이 성립되는 것인데, 실행하기도 전에 자신이 어찌 명덕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같은 책, 2-1: 8a). 이런 토대 위에서 목민교육의 이념을 1강령(명덕)과 3조목(효도·우애·자애)으로 규정한다. 대학의 기본체계를 재편성하려는 다산의 태도는 도를 실천적 인도(人道)로서 파악하는 그의 기본입장을 보여준다. 이것은 또한 성리학의 형이상학적인 관념체계로부터 벗어나 현실적 인간관계속에 실천규범을 확립하고자 하는 다산의 노력이기도 하다(금장태, 1980: 19). 특히 목민의 원리는 자애의 덕으로 제시되고 있다. 대학의 '대학지도 재친민'의 구절을 두고 주희는 '친민'을 '신민'으로 고쳐야 한다하고, 왕양명은 주희의 생각이 그릇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백성을 새롭게 함(주희의 신민)은 백성과 목민관의 불평등을 반영하고, 백성을 친하게 함(왕양명의 친민)은 백성과 목민관의 관계가 평등을 나타낸다는 주장이 있다(권중달, 1987: 150). 여기에 대해 다산은 처음대로 친민으로 두어도 백성을 친하게 함과 백성을 새롭게 함이 의미상 대립된 것이 아님을 논증함으로써(같은 책, 2-1: 11a), 주희의 관점과 왕양명의 관점을 변증법적으로 포섭하고 있다. 친민 또는 신민은 명덕 또는 인륜으로서 인의 한가지 내용이다. 

 

주 5) 이 도리는 맹자가 제나라 대부 공구심에게 던진 질문에 담겨있다. 즉 "이제 남의 소와 양을 인수받아 그 임자를 위하여 길러주는 사람(목자)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소와 양을 기르기 위하여 반드시 목장과 목초를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목장이나 목초를 구하다가 얻지 못하면 맡았던 소와 양을 주인에게 돌려보내야 할 것입니까, 아니면 우두커니 선 채 굶어죽어 가는 꼴을 보고 있어야 하겠습니까?"(『맹자』, 공손추 하4). 
주 6) 정덕과 후생의 출전은『서경』(대우모6)이다: "덕을 바로 잡고 쓰임을 이롭게 하며 삶을 두텁게 함을 조화시키라"(正德利用厚生 惟和). 
주 7)『논어』(학이2)에 제시된 인(仁)의 의미는 '왼쪽 그림'에서 보듯이 효도와 우애로 포함한다(A). 그러나 효도와 우애에 자애라는 다른 방향을 보탬으로써 다산은 인(仁)의 의미를 보다 적절하게 재구성했다(B).            
주 8) 덕(德)이란 글자 또한 行·直·心으로 구성되어 있다.

Ⅲ. 목민교육의 방안 
  

앞에서 보았듯이 다산에 있어서 정치와 경제의 궁극적 의의은 교육에 있고 그것은 효도·우애·자애라는 명덕의 이념을 지향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목민교육의 구체적 방안을 다산은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가? 논자는 실학연구에서 사용된 용어인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라는 표현이 대체적으로 다산의 교육관에서 목적, 내용, 방법에 각각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먼저 이용후생적 교육내용을 살펴보고, 이어서 실사구시적인 교육방법을 검토할 것이다. 

 

 ⑴ 이용후생적 내용 
다산의 교육내용은 이용후생적이다. 이용후생적이라 함은 백성이 사용하는 기구 따위를 편리하게 하고 의식(衣食)을 풍부하게 하여 생활을 윤택하게 함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학파의 학풍으로써 '이용후생학파'는 연암 박지원(1737-1805) 중심으로 한 상공업의 유통, 생산기구, 일반 기술면의 혁신을 지향하는 학파를 가리킨다(이우성, 1973: 6). 다산의 교육내용은 대체로 보아서 첫째 과학과 기술, 둘째 경학(6경4서), 셋째 한국학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과학과 기술: 일반적으로 실학자들은 실용적인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다산은 이익(성호)을 대종으로 하는 경세치용학파의 중요한 계승자이며, 한편으로 박지원(연암), 박제가(초정) 등 이용후생학파의 선진적 생산기술 혁신론을 섭취하였다(이익성, 1992: 3). 이런 견지에서 그는 목민관의 학문9>
은 성리학이나 문장학에서 벗어나 민생을 위한 지식과 기술을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참된 선비의 학문은 본래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외적을 물리치고 국가재정을 넉넉하게 하여 문무 어느 것이나 능통하여 무엇이든지 담당하지 못할 것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어찌 문장과 구절을 찾아내거나 글자에 대한 주석이나 하고 옛날 옷을 입고 절하는 것만 익히는 것뿐이리요. …… 후세 유학자들은 성현의 참뜻은 알지 못하고 무릇 인의(仁義)와 이기(理氣) 이외에 한 마디라도 말하면 그만 잡된 학문이라 지목한다(전서, 1-1: 8ab, 속유론).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을 지표로 삼고 다산은 공리공론에 젖은 비생산적인 성리학을 비판하면서 선진기술의 적극적인 도입과 습득이 중요함을 주장한다. 따라서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교육의 주되는 내용으로 할 것을 요구한다. 다산은 무엇보다 먼저 백성이 물질적으로 윤택한 생활을 누려야 한다고 보았다. 부유하게 한 뒤에 교육을 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 는 것이다(전서, 5-9: 1b, 경세유표). 이렇게 국민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길은 과학과 기술 즉 기예(技藝)를 습득함에 있다. 기예를 습득하기 위해서는 이를 가르쳐야 한다. 또한 필요하다면 외국의 기예를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 목민관이 기예를 중시하여야 민생은 향상되고 군대도 강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동떨어진 현실을 그는 크게 개탄한다. 


우리 나라의 온갖 기술은 모두 옛날 배워온 중국의 방식이다. 중국에서는 새로운 기술이 날마다 발전하여 수백년 이전의 중국과는 아주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는 막연하게 알아보지도 않고 오직 옛날의 그 기술만으로 만족하게 여기고 있으니, 어찌 이다지도 게으르기만 한가(전서, 1-11: 11a, 기예론).   다산은 교육내용으로 삼아야 할 기예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여기에는 농업, 방직, 군사, 의술 등이 포함된다. 다산은 기예의 이론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생활에 응용하는 능력 또한 탁월하였다. 정조(1770-1800 재위)의 각별한 신임을 받으며「수원성제(水原城制)」를 찬술하라는 명을 받고 다산은 화성(華城)의 축성계획을 작성한 바 있다. 여기에는 성을 쌓는데 사용되는 기구로서 기중기, 활차 등의 제작 및 운용에 관한 해설도 포함된다(전서, 1-10: 13b-25a, 성설, 옹성도설, 포루도설, 현안도설, 누조도설, 기중도설). 다산의 설계 아래 과학적 장비를 만들어 활용함으로써 작업능률을 극대화함과 더불어 경비를 아주 크게 절약하는 실제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10>을 보여주었다(이문원, 1983: 135). 경비의 절감은 물론이고, 이렇게 완성된 성은 가장 훌륭한 성곽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이와 같이 다산은 일상생활에서 과학기술의 적용을 중요시하였고 스스로 본보기가 되었다. 
 

2) 6경4서: 과학과 기술을 중시하고 있다고 하지만 다산은 어디까지나 유학자이다. 앞서 보았듯이 시비의 정덕을 이해의 후생보다 우선시하고 있다. 즉 다산에 있어서 행동의 '올바름'이야말로 '이로움'으로 간주된다. 이런 견지에서 그의 일차적 관심사은 덕행이다. 


덕행이 근본이고, 경술(經術)이 그 다음이고, 문예가 끝이다(전서, 5-15: 12b, 경세유표).   다산은 목민의 학으로 경학의 연구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한다. "폐법과 학정이 생기는 것은 모두가 경전의 취지에 밝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다. 나라를 다스리는 요지는 경전에 밝은 것보다 앞설 것이 없다"(같은 책, 5-10: 16a). 여기서 다산이 말하는 경전은 '10경'이다. 다산의 10경에는 4서 3경에 주례, 예기, 춘추가 추가된 것이다. 4서(대학, 맹자, 논어, 중용)와 3경(시경, 서경, 역경)은 주자학적 권위에 의해 당시 한국 경학에서 가장 중시하던 전적이다. 다산은 7서(4서 3경)에 편중된 경학공부가 불충분한 것으로 보고 10경(4서 6경)을 학습내용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는 18년의 유배생활에서도 경전연구에 몰두하는 등 평생을 경학연구에 바쳤고, 또한 후손들에게도 경학공부를 권장하였다. 다산경학은 그의 일표이서와 함께 다산학의 두 기둥을 이룬다. 


 다산의 6경4서학은 그의 경국제세학, 곧 경세학으로서의 일표이서외 기초학이요, 그의 일표이서는 그의 6경4서학 응용학이니 만큼 어쩌면 다산경학이야말로 다산학 자체의 기초학이라 해야 마땅할는지 모른다(이을호, 1985: 117).   다산의 6경4서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같은 책: 134-137). ①『대학』: 주자의 학설의 그릇됨을 지적하면서, 신심묘합설을 전개하고, 명덕이 효·제·자(孝·弟·慈)의 실천윤리임을 증명한다. ②『중용』: '천명지위성'이란 구절이 성명학의 대종임을 밝혔고 나아가 성기호설 등을 정립한다. ③『맹자』: 인의예지의 선천설을 주장한 주희의 관점을 비판하고 실천윤리적 결과설을 확립한다. ④『논어』: 고주와 신주에 대한 시시비비의 태도를 견지하면서, 주희가 인을 '심지덕 애지리'라고 관념적으로 본 것을 거부하고 효·재·자의 행동적 구현임을 밝힌다. ⑤『상서(尙書)』: 고금문의 위작을 밝히고 그릇된 내용을 바로 잡았다. ⑥『춘추(春秋)』: 과거 학자들이 이 책을 다룬 태도를 비판하고 참위술수를 배격하였다. ⑦『역경』: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역리4법을 정립하고 역리에서 오행설을 제거한다. ⑧『시경』: 시의 윤리적 기능을 높이 평가한다. 주희가 풍간(諷諫)의 기능을 제거한데 대하여 비판한다. ⑨『예학(禮學)』: 주례에 준하는『방례초본』(경세유표)을 저술하고 관혼상제의 사례를 중시하였다. 사대부중심의 예법이라는 한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⑩『악서(樂書)』: 다산은 고악(古樂)의 순수이론만 정립하고 술수가(術數家)들의 사설을 일소하고 있다. 
  

여기서 보듯이 다산의 경학은 그 범위에 있어 백과전서적이다. 그리고 어떤 측면에서 낡은 규범과 사상을 철저히 탈각하지 못하였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교육내용은 유교적인 형식에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고 인륜의 실천을 지향하는 점에서 특색을 보여준다. 

 

 3) 교육내용의 한국화: 주체성의 측면에서 볼 때 다산의 교육내용은 크게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컨대『소학』,『대학』,『논어』,『맹자』,『중용』,『시경,『예경』,『역경』,『춘추』, 등 4서 5경을 순환하여 숙독하라는 율곡의「격몽요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전통사회에서는 우리 글, 우리 역사, 우리 문화가 청소년 교육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이런 실정에 비해서 다산의 교재관은 그의 주체적 입장을 보여주어 주목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고사를 알지 못하고 선배들의 의논을 보지 않으면 그 학문이 고금을 꿰뚫는다 해도 엉터리가 되고 만다"(전서, 1-21: 4b, 기이아)고 하여, 다산은 우리 것을 배척함이 우리의 큰 병통임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걸핏하면 중국의 일을 인용하고 있으니, 이 역시 볼품없는 일이다. 반드시『삼국사기』,『국조보감』,『여지승람』,『징비록』,『연려실기술』및 우리 나라 문학 등에서 사실을 뽑아내고 지방을 고찰하여 시에 인용한 다음이라야 세상에 이름이 나고 후세까지 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유해풍의『십육국회고시』를 중국인이 출판한 바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증명할 수 있다(전서, 1-21: 9b-10a, 기련아).   여기서 유혜풍은 박지원의 문하생으로서 당시 한문학의 4대가 가운데 한 인물인 유득공(1749-?)을 가리킨다(김태오, 1992: 183). 그리고 그의『십육국회고시』란 작품은 단군 조선에서 부터 고려까지 우리 나라 역사를 노래한 시이다. 위의 주장은 다산의 문학적 지향점을 나타내고 있는 바, 그것은 민족적 색체를 풍기는 시를 써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본래 조선 사람 조선 시를 즐겨 쓰리라"(전서, 1-6: 34a, 노인일쾌사)고 마침내 다산은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는 2500 남짓 되는 시를 남긴 뛰어난 시인이다(송재소, 1992: 291). 이러한 다산의 시들은 사회시, 자연시, 우화시 등으로 구분된다. 이들이 한글로 쓰여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민중문학 자체는 될 수 없지만, 그의 시가 강렬한 감동을 주는 까닭은 민중적인데 있다(송재소,1986: 187). 다산이 중국 문자인 한자로 시를 쓰면서 민족주체의식을 담는다는 것은 언뜻 모순되는 말인 것 같다. 그러나 이를 두고 그 나름대로 중화주의의 절대적인 권위를 벗어나고자 노력한 이와 같은 다산의 민족주체의식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는 이 땅에 태어나 이 땅에 사는 것을 떳떳하게 생각했고, 이 땅에 사는 한 우리의 정서를 우리 식으로 노래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겼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한자를 빌어 쓰긴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시를 중국 문학으로 여기지 않았고 중국적인 기준에서 평가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중국을 정신적 고향으로 생각하고 우리 문학을 중국의 주변문학으로 착각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다산의 견해는 매우 값진 것이라 할 수 있다(송재소, 1992: 294).   다산은 우리가 '군자의 나라'에 사는 우수한 문화를 가진 민족임을 믿는다. 그에게서는 사대주의적 사고방식을 벗어난 우리 나름의 문화전통을 가졌다는 뚜렷한 국가의식을 엿볼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다산은 아들들에게 책을 저술할 때는 반드시『퇴계언행록』,『퇴계집』,『해동명신록』,『조야수언』등에서 중요한 부분을 참고하여 수록할 것을 당부한 바 있다(전서, 1-21: 16a, 기양아). 그리고 과거시험에서도 우리 역사를 시험과목으로 해야 한다는 매우 혁신적 주장을 펼친다. 여기에는『삼국사기』,『고려사』,『동국통감』,『국조보감』,『동사집성』등이 포함된다. 이처럼 다산은 과거를 보려는 사람은 반드시 국사를 이해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비어고』,『대동수경』,『강역고』등에서 우리 나라의 역사와 지리에 관하여 치밀한 고증을 해놓았다(송재소, 1986:37-38). 이러한 노력에는 교육내용의 주체화를 지향하는 다산의 선각자다운 자세가 뒷받침되어 있다. 

 

주 9) 목민관은 다방면의 식견과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목민심서」는 지방행정의 일선 책임자인 수령(지방장관)들의 행정지침서이다. 여기서는 목민관이 고을에 부임하는 날부터 퇴임하는 때까지 지켜야 할 사항을 기록해 놓았다. 이 책은 백성에 대한 참다운 애정을 토대로 백성을 병들게 하고 있는 지방행정의 실태를 낱낱이 점검한다. 즉 하급관리 즉 아전들의 임용과 단속, 지방민의 예절과 교육지도, 재판의 공정성, 합리적 조세행정, 산림과 하천 등 자원의 보호와 이용,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영농법과 각종 농기구의 계량 및 보급,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지역 방위체계의 확립, 홍수나 가뭄 등 재해가 발생했을 때의 지원방법을 비롯하여, 심지어는 질병이 생겼을 때의 민간 치료요법 , 가축을 기르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수령의 권한이 미치는 거의 모든 일에 대한 지침이 빠짐없이 언급되어 있다(송재소, 1982: 287). 
주 10) 이 사실은 정조가 "다행히 기중기가 사용되어 경비를 4만 궤미(緡)나 절감하였다"고 치하한 말에서 확인된다. 

 

⑵ 실사구시적 교육방법
'실사구시'란 현실에 토대를 두고 올바른 것을 찾는다는 것이다. 실학의 유파로서 '실사구시학파'란 경서와 금석전고의 고증을 위주로 하는 김정희(추사)에 이르러 일가를 이룬 학파를 일컫는다. 여기서는 공리공론을 반박하고 과학적·객관주의적 학문의 태도를 중시한다. 이런 견지에서 다산의 교육방법은 실사구시적인 것으로 특징 지울 수 있다. 교육방법에서 현실에 근거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특히 학습자의 현재능력과 이해수준을 존중하고, 현실생활 가운데서 교육이 성립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 추서를 통한 인의 실현: 인륜을 실천하는 다산의 방안가운데 격치와 성정밖에도 恕라는 방법이 있어 이채롭다. 잘 알려진 대로 이 방법은 논어에 제시되어 있다. '나의 도는 일관성이 있다'라고  孔子가 말한 바에 대해 증자(曾子)는 스승의 '道'를 '忠恕'로 해명한 바 있다(논어, 이인15). 주희는 충서에 대해 '충(忠)이란 진기(盡己: 최선을 다함)이고, 서(恕)란 추기(推己: 자기를 미루어 헤아려 줌)이다'라고 주석한 바 있다. 그러나 다산은 이와 같이 '도(道)'를 '충'과 '서'로 분리하여 설명하는 주희의 관점이 잘못된 것임을 논증한다. 그에 따르면 충은 서의 형용사일 따름이므로 두개로 나누어 해설할 수 없다. 즉 忠恕라는 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서를 실행하는 것'(전서, 2-1: 35b, 대학공의) 다산이 주희의 견해를 수정하는 것은 서에 대한 유교 본래의 실천적 의미를 회복시키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다산이 주목한 '진실한 마음으로 서를 실행하는 것'으로서의 도는 '형이상이 도이다'(주역, 계사전 상11)나 '한번은 음이 되고 한번은 양이 되는 것이 도이다'(주역, 계사전 상5)라 할 때의 초월적 긍극적인 개념으로서의 도와 다른 것이다. 다산은 도를 현실적 실천적으로 해석한다. 도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람이 말미암는 바'(전서, 2-4: 4b, 중용강의) 또는 '만남을 잘 하는 것'(전서, 2-13: 43b, 논어고금주) 등으로 규정한다. 곧 도란 사람 사이의 만남을 위한 방법적 원리이다(금장태, 1985: 160). 이는 다산의 도가 인도임을 가리킨다. 여기서 인도로서의 서는 '용서'가 아니라 '추서'에서 근본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나는 이렇게 본다. 서(恕) 자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추서(推恕)요, 다른 하나는 용서(容恕)인 것이다. …… 사람과 사람이 교제할 때는 오직 추서만을 요긴한 방법으로 여겨야 한다. 옛 성인들이 '서'를 말할 때는 모두 이러한 뜻이었다. …… '추서'와 '용서'는 비록 서로 가까운 것 같으나 그 차이가 천리나 된다. '추서'란 스스로 가다듬는 것을 주로 하여 자기의 좋은 점을 실행하는 것이요, '용서'란 남을 다스리는 것을 주로 하여 남이 한 나쁜 짓을 관대하게 보아주는 것이다(전서, 2-1: 35a, 대학공의).   이와 같이 용서가 아니라 추서가 '서'의 정당한 내용이라는 주장이다. 거꾸로 말하면 서를 용서(사람을 다스리는 것)로 간주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남을 다스리는 것(용서)은 결국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추서)에 근거해 있다. 이들이 비록 이치는 통하는 것이나 차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에게 요구하고 남을 나무라는 것은 추서를 거꾸로 말한 것이다. 
  

다산은 대학의 근본취지가 백성들을 교화(化民)하려면 먼저 스스로 가다듬어야(自修)하고 반드시 먼저 미루어 생각하는 마음(恕)을 간직해야 함에 있음을 제시한 것이라 본다. 목민관이 스스로 실천해야 백성들도 또한 효도·우애·자애를 일으킬 것이다. 그래서 헤아려 보되 나에게 효도와 우애가 있으면, 이내 백성들에게 요구할 수 있고, 헤아려 보되 나에게 불효한 짓이 없으면, 이내 백성들을 나무랄 수 있다(같은 책, 2-1: 35b).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남들도 이를 좋아하는 것임을 알 수 있으니, '헤아려보는 길'을 시행함이 바로 미루어 생각함(서)이다. 
  

서(恕)란 글자그대로 같은(如) 마음(心)으로(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헤아려 보는 것이다. 내 마음이 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이 하고자 하는 그것임을 헤아리는 것이다. 서란 미루어 생각하는 것 곧 남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는 것이다. 이는 또한 "한 마디 말로 평생을 두고 실천할 만한 것이 있읍니까?"라 물은 子貢에게 한 孔子의 대답이었다. 다산은 서란 사람다움(仁)의 길로 파악한다(공의,169). 이어서 공자는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남에게 베풀지 말라"(논어, 위령공23)고 하였는데, 다산은 이 말이야말로 '미루어 생각함'의 실천방법이라 보았다(전서, 2-1: 35a, 대학공의). 다산은 추서란 자기를 다스림이고 나아가서 '사람과 사람의 사귐'(같은 책, 2-1: 40b-41a)으로 제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다산은 서를 인륜실천의 구체적으로 방안으로서 역설한 것으로 이해된다. 

 

 2) 격치와 성정: 다산은 격물(格物)·치기(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을 수기와 목민의 교육방법으로 본다. 앞서 말했듯이, 주희는 이 네 가지 또한 교육의 목표로 간주하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와 더불어 대학의 '8조목'으로 규정한 바 있다. 이런 견해를 거부하면서 다산은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대학의 조례로 말하면 강령은 명덕이고, 조목은 효도·우애·자애라 할 따름이다"(같은 책, 2-1: 9b). 주희의 3강령 8조목은 이리하여 다산에 의해 1강령 3조목으로 정정된다. 이어서 그는 주희의 8조목 가운데 격물·치지·성의·정심을 '성인문하에서 내려오는 비결'이라 주장함으로써 이들은 단지 인륜을 실천하는 교육방법임을 밝혔다. 
  

먼저 격물과 치지의 방법을 살펴본다. '격물'이란 사물을 헤아린다는 말이고, '치지'란 그 결과 철저하게 안다는 말이다. 사물을 헤아린다는 것은 일(事)의 시작과 끝이 어디에 있으며 대상(物)의 근본과 말단이 무엇인가를 찾아봄이다. 그리고 철저한 앎이란 것은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할 것인가를 확실하게  인식함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안다는 것은 행한다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같은 책, 2-1: 20b). 다산에 따르면, 사물을 헤아려서 투철하게 안다는 것은 자연적 대상물에 대한 과학적 인식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래서 격물과 치지는 가정·국가·천하의 근본이 모두 자신에게 있음을 아는 것이다(같은 책, 2-1: 17a). 목민하는 일도 자신의 덕을 찾고 밝히는 것에 비해 말단임을 아는 것이다.(같은 책, 2-1: 19b) 왜냐하면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고는 남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사랑(amour de moi)이야말로 인류사랑의 단초로 파악한 루소의 관점(에밀, 제 4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보인다(안인희, 1990: 106). 다시 말해서 목민의 근본은 수신에 있다. 다산의 견해로는 격물과 치지는 인륜을 잘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실천적인 의미를 지닌다. 다산의 이른바 '격치도'(전서, 2-1: 17b, 대학공의)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어서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에 대한 다산의 견해를 살펴보자. 앞서 말한 대로 이것들을 교육목적이 아니라 효도·우애·자애라는 인륜의 이념을 실천하는 방법이다(같은 책, 2-1: 7a). 다산은 이것을 두고 마음 다스림을 목적으로 삼는 보는 불교와 다른 관점으로 파악한다. 선가(禪家)에서처럼 벽을 향하고 앉아서 마음을 들여다보며, 스스로 허령한 본체를 검사하고 담연히 허공처럼 밝아서 티끌 하나 섞이지 않는 것을 '이것이 정심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유교에서도 성의와 정심이 비록 배우는 사람들의 지극한 공부로 인정되지만,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까닭은 불교와 달리 해야할 일을 위해서 라는 주장이다. 이런 견지에서 다산은 성의와 정심이 사물을 접할 때에 있는 것일 뿐, 고요하게 참선하는 때에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같은 책, 2-1: 9b). 불교를  비판하고 성의와 정심이 일상적으로 사물을 접할 때 있는 것으로 본 점은 그 옮고 그름을 떠나서 다산의 교육방법이 매우 실천적인 관점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예전 성인들이 마음을 다스리고 본성을 고치는 것은 매양 일을 실천함에 있었고, 이 일을 실천하는 것은 인륜밖에 따로 없는 것이었다. 진실한 마음으로 부모를 섬기면 성의와 정심으로 효도를 이루게 된다. 진실한 마음으로 어른을 섬기면, 성의와 정심으로 우애를 이루게 된다. 진실한 마음으로 어린 사람을 자애롭게 기른다면, 성의와 정심으로 집안을 정제하게 되고, 성의와 정심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되고, 성의와 정심으로 세상을 평화롭게 할 것이다. 성의와 정심은 매양 일을 실천하는 곳에 의거하고, 성의와 정심은 매양 인륜에 붙박혀있는 것이다. 한갓 뜻만으로는 정성스러울 수 있는 이치가 없고, 한갓 마음만으로 올바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이다. 일을 실천함을 제외하고는 인륜을 떠나서 마음만으로 지극한 선에 그치기를 요구한다는 것은 예전 성인들의 본래의 방법은 아니었던 것이다(같은 책, 2-1: 13ab).  3) 문자학습: 다산은「목민심서」에서 향학(소학)의 교육문제를 다루고 있다. 첫째의 문제는 당시의 학교교육이 책을 읽는 것(독서)에 그치고 있는 데 있다. 이런 지적은 향학에서 하는 독서 그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교육의 기본정신인 효도·우애·자애의 실천에 힘쓰지 않고 있다는데 있다(최동희, 1988: 195). 둘째로 향학(소학)에서 특별히 힘써야 할 글자를 올바르게 알기 위한 공부(文學)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소학』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한문에 대한 어학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따라서 학교를 흥하게 하는 것(흥학)은 소학에서의 어학교육에 달려 있다. 다산에 따르면, 목민관이 지방교육을 함에 있어서 특별히 힘써야 할 것은 독서를 위한 올바른 어학교육이다. 그리고 '책을 읽는 것'(독서)은 인륜을 공부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이다. 다산은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한 문자학습은 '육서(六書)'를 정확하게 아는 것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고 본다. 


문학은 옛날 소학에서 가르치던 것이다. 문학의 가르침은 육서를 주로 하였다. 형상(象形)·회의(會意)·전주(轉注)·가차(假借)·형성(形聲)·지사(指事)를 육서11>라고 한다. 문학을 일으키려면 이 육서의 학이 으뜸가는 임무일 것이다(전서, 5-22: 56a, 목민심서).   아동들은 문자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소유해야  한다. 그래서 다산은 아동의 문자 학습서는 올바른 유별의 분류체계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형상이 있는 물(物: 石, 士 등)과 형상이 없는 정(情), 무위의 정(情: 淸, 濁 등)과 유위의 사(事: 流, 突등)를 분류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다음의 말은 이러한 다산의 문자학습관을 보여주고 있다. 


 문자가 발생한 까닭은 만물을 유별하기 위함이다. 어떤 것은 형(形)으로 어떤 것은 정(情)으로 어떤 것은 사(事)로써 만들어 졌다. 반드시 종류에 따라서 모아 두루 통달해서 그 붙이(族)를 다 알고 그 다른 것(異)을 구별한 다음이라야 실정과 이치가 명백해지고 지혜가 개발된다(전서, 1-22: 28a, 천자평).   조선조 아동의 최초의 교육은 한자 학습이었고, 그 대표적인 교과서는『千字文』이다. 조선조의 학자들은 한자학습서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 결과 서거정의『類合』(조선 성종때), 최세진의『訓蒙字會』(1527), 유희춘의『新增類合』(1576), 정약용의『兒學編』, 이승희의『正蒙類語』(1884) 황응두의『通學徑編』(1916) 등 한자교재가 만들어 졌다(임지용, 1989: 397-406). 이들 가운데『아학편』은 다산이 당대의 한자교재가 지닌 결점을 보완하고자 간행한 것이다. 당시에 보편적인 교육서는 梁나라 周興嗣가 지은『千字文』이었다. 그러면『아학편』은 어떻게 편성되는가? 이는 상하 두 권으로 나누어져 편성된 2천자문이다. 다산은 이 책에서 유형자와 무형자의 엄격한 구분, 유별분류체계12>라는 두 원칙을 제시함으로써 감각경험을 통한 문자학습을 시도한다. 즉 상권(1.000 개의 문자)은 유형자(實字; 구체명사)로, 하권(1.000 개의 문자)은 무형자(虛字; 추상명사, 대명사, 형용사, 동사 등)로 구성된다.『천자문』과『아학편』의 첫머리를 대조하면 다음과 같다. 

 

『천자문』 『아학편』
天·地·玄·黃·宇·宙·弘·荒 天·地·父·母·君·臣·夫·婦

 
 그러면 다산은『천자문』이 지닌 체제 및 내용의 결함을 무엇으로 보는가? 그것은 초경험적이고 사변적인 논리의 전개로 현실세계와 유리된 성리학적 관점을 거부하는 다산의 역사의식과 상통한다. 다산은 그 시대의 암기식 교수의 맹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天·地·玄·黃·宇·宙·洪·荒'의 여덟 자가 만들어 내는 문장의 깊은 뜻을 파악할 수 없는 아동의 이해수준에도 불구하고 글자를 구송하여 익히게 하는 방식이었다(정순우, 1982: 77). 다산은『천자문』은 서거정의『유합』보다 못한 일시의 희작(戱作)에 불과한 것으로 규정하고, 다음과 같이 구체적 예를 들어 그릇됨을 신랄하게 지적한다. 


天자와 地자를 배우고 나면 日·月·星·辰·山·川·丘·陵과 같은 붙이를 다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도 서둘러 그만두고서 하는 말이 '네가 배울 것을 잠시 그만두고 五色을 배워라' 하니 무슨 법이 이런가. 玄자와 黃자를 배우고 나면 靑·赤·黑·白·紅·綠·紫의 차이를 구별함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서둘러 그만 두고나서 말하기를 ' 네가 배울 것을 잠시 접어두고 宇宙를 배워라'하니 이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전서, 1-22: 28a, 천자평).   이러한 다산의 문자학습관에서 만들어진 아학편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로 '天地父母', '兄弟男女', '春夏秋冬', '寒暑溫 ' 등과 같은 음양 대치적인 배열에 따르고 있다. 대치적인 글자배열 방법은 사물의 추리를 용이하게 하고 기억에 도움이 된다(이문원, 1983: 126). 둘째로 '耳目口鼻'와 같은 한자구성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앞서 강조한 육서와, '樹林菓 '(여유당전서보유 2책: 300) 등과 같이 편(偏)·방(旁)의 법칙을 학습할 수 있도록 배열되어 있다. 육서학습의 강조는 아동에게 한자의 글자구성의 원리를 깨우쳐주기 위함이다. 이러한 배열은 학습자의 인지체계에 맞추고 한자의 구성원리를 효과적으로 깨우치게 함으로써 맹목적인 구송에 의한 학습방법을 지양하려는 합리적 사고(과학적 접근)가 엿보인다. 달리 말해서 아동의 인지능력에 맞춘 감각경험에 근거한 앎의 실현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다산이 성리학자들의 보편지에 의한 분류체계와 구별되는 경험적 원리를 제시한 것으로 풀이된다(정순우, 1990: 94). 감각적 경험을 통한 문자학습은 대체로 아동들의 현재적 능력과 흥미의 존중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볼 때 이는 또한 실사구시적 방법으로 평가된다. 

 

주 11) 육서 가운데 '상형'은 日, 月, 山, 水와 같이 물체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기호이다. '회의'란 明, 多, 信, 恕와 같이 이미 만들어 낸 글자를 취하여 새로운 개념을 나타낸 글자이다. '전주'는 老와 考를 또는 之와 的을 바꾸어 쓰듯이 이미 만들어 낸 글자를 가지고 뜻이나 소리를 전용하는 것을 말한다. '가차'란 보리를 뜻하던 來자를 오다란 뜻으로 또는 새가 둥우리에 들어 있는 것을 나타내는 西자를 서쪽을 나타내는 것처럼 이미 만들어진 글자에서 그 낱말과 같은 소리의 글자를 빌어서 쓰는 것이다. '형성'은 植, 鐘과 같이 한 글자는 사물의 모양 및 종류를 다른 글자는 음을 나타내도록 한 것이다. '지사'는 上, 下, 本, 末과 같이 추상적으로 이해되는 동작, 상태, 위치 등을 나타낸 기호이다(이윤옥, 1992: 4-5). 
주 12) 「아학편」의 편찬순서는 다음과 같은 유별편찬체계를 따르고 있다(김병권, 1979: 155). 
                               人 - 天 - 地 - 動物 - 植物 - 住 - 器 - 衣 - 食 
            또한 이 원칙에 따라 배열된 항목은 다음과 같이 분석될 수 있다(정순우, 1990: 75-76). 
           

Ⅳ. 맺음말 
  지금까지 다산 정약용의 목민정신을 밝히고 이와 관련된 그의 교육적 사고를 살펴보았다. 다산의 목민철학과 교육관은 어떤 특색을 지녔는가? 먼저 목민철학을 인간관과 교육이념으로 나누어서 살펴 본 결과 여섯 가지의 특색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첫째로 인간은 다른 동물 및 구별되는 존재로 규정되고 자연과 이분법적으로 구분된다. 다산은 인간존재가 영장이 되는 근거를 도덕적 지적으로 탁월한 능력에서 찾았다. 특히 인간의 지적 탁월성은 기예를 사용함으로써 개인적 사회적 진보를 도모할 수 있는데 있다. 둘째로 인간의 본성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한다. 이러한 기호로서의 인성은 성리학과 달리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이 융합되도있다는 점에서 그만큼 기질을 중시하는 현실적이고 경험적 인간관이 된다. 셋째로 인간은 스스로 마음먹는 대로 선악을 실행하는 도덕적 주체이다. 이러한 개체적 자율적 인간관에서 다산은 도덕을 도심과 인심의 갈등하는 현실에서 마음이 자주권 행사함에 따라 이루어진 행동결과로서 파악된다. 넷째로 인간은 신분과 지위의 존비귀천을 떠나서 평등하다. 이러한 평등의식과 더불어 다산은 백성이야말로 목민관의 주인임을 분명히 했다. 다섯째 목민관의 백성을 위한 책무는 목민심서에 제시된 72개 조목에서 보듯이 매우 다양하다. 다산에 따르면 목자의 책무와 애민정신의 구현은 근본적으로 목민관 자신과 백성의 인간적이고 직무적인 교육을 요청한다. 여섯째 목민관이 백성에게 가르쳐야 하는 동시에 자기를 교육(수기목민)하는 근본원리는 효도·우애·자애의 이념이다. 다산은 명덕을 대학의 유일한 강령으로 규정하고 그 실체가 효도·우애·자애임을 입증하였다. 
  

다음으로 목민교육의 구체적 방안을 내용과 방법으로 나누어 고찰한 결과는 여섯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로 목민의 학으로 가장 중요한 교육내용  이른바 6경4서이다. 6경4서에 대한 경학연구에서 다산은 비판적 시각으로 낡은 유교적 형식에 새로운 내용을 담고있다. 둘째로 목민관은 부국강병과 민생의 후생에 이바지하는 기예를 교육내용으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기예에는 농업, 방직, 군사, 의술 등을 포함되는데, 다산은 외국의 선진화된 기예의 적극적인 도입을 역설하였다. 셋째로 우리나라의 문학, 역사, 지리 등을 교육의 내용으로 중시되어야 한다. 이는 중화주의의 절대적 권위에서 탈피하려는 다산의 민족주체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넷째 미루어 생각함 이른바 '恕'는 인륜실천의 구체적 교육방법이다. 다산의 논증에 따르면 남을 다스리는 일(용서)보다는 자기를 다스리는 일(추서)이 보다 근본이 된다. 다섯째 격물과 치지 및 성의와 정심 또한 목민관의 자기교육을 위한 방법으로 파악된다. 다산은 격치와 성정에 대한 성리학 이나 불교의 입장을 비판하고 이것들이 결코 교육의 목적으로 간주될 수 없음을 밝혔다. 여섯째 인륜공부를 위한 책읽기에는 먼저 문자에 대한 정확한 개념의 형성이 필요한데, 이를 위한 교육방안으로『아학편』이 편찬되었다. 그러므로「아학편」은 아동의 이해수준과 학습의 효율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다산의 합리적 문자학습관의 소산이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다산의 관점이 갖는 한계점은 무엇인가?  첫째로 비록 후생문제를 도외시하지는 않았지만 정덕의 가치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이 점에서 다산이 단지 인륜적 가치의 구현에 촛점을 맞추는 유학과 성리학의 접근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낸다. 그 결과 도덕교육이 다른 측면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로 인간평등관에 입각하여 목민관의 백성에 대한 봉사정신 강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불평등한 제도를 개혁하는 철저성에 이르지 못했다. 다산은 비민주적 노비제도의 철폐하여 평등에 도달하자는 급진적 주장을 펼친 바 없는 것은 그가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고 있지 못함을 가리킨다. 셋째로 교육적 과정에서 6경4서라는 방대한 분량의 경전을 연구해야 함은 국학진흥이란 주체성의 문제를 야기한다. 이는 첫 번째의 한계점과 내적인 관련을 갖는 것으로서 다산학은 유교적 교육내용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있다. 넷째로 교육내용의 한국화를 시도했지만 그가 우리 글을 통해 저술하고 이를 제도화하는 어떤 사상적 장치를 마련하지 못했다. 이 점에서 그의 주체성은 당시의 분위기와  사상가들이 그러했듯이 보수적인 것이었다. 물론 이 말은 그가 우리문화를 가벼이 여기고 사대주의에 젖었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섯째로 다산이 지적한 성의와 정심은 교육의 목적이 아니라 방법에 불과하다는 입장에서 불교적 관점의 비판을 그대로 수용하기 어렵다. 그것은 다산의 선불교에 관한 이해가 불충분함 또는 성정에 대한 의미파악이 서로 다름에 근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산의 인간 및 교육관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함의 및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성리학적 사변의 형식성에서 벗어난 현실적 인관관이다. 그는 충분한 논증을 통해서 성리학적 관점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독창적인 대안을 제시하였다. 둘째로 애민정신을 실천방안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기목민의 근본적 원리가 효도·자애·우애의 교육에 있음이 확실히 밝혀졌다. 셋째로 인간의 가치판단의 우선 순위을 확립하였다. 다산이 '시비'의 준거가 '이해'의 준거보다 우선시하는 것은 오늘날의 편의주의와 실종된 가치관을 반성하는 발판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다산은 대립된 준거를 양자택일할 수밖에 없다는 비관적 입장을 벗어나서 이상적 규범으로서 '시(是)'와 현실적 가치로서 '이(利)' 모두가 실현되는 가장 높은 지평을 상정하고 있다. 넷째로 스스로 수원성 축조에서 한 본보기를 제시하였듯이, 과학과 기술을 교육의 내용으로 삼고 이를 도입하고 적용하여 국민생활의 효율성을 도모하였다. 이는 교육에서 추구할 가치가  공리공론적 허구가 아니라 생산성이 되어야 함을 웅변적으로 입증한 것이다. 다섯째로 학습과 교육의 방법에서 실사구시적으로 건전함을 보여준다. 그는 {천자문}의 근본적 맹점이 학습자의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사변의 논리와 맹목적 주입교수로 이어지는데 있음을 꿰뚫어 보았다. 특히 그의 이러한 문자학습관을 반영하고 있는 {아학편}에서 보듯이 아동의 현재적 특성과 이해력을 존중하고 있다. 여섯째로 조선시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인 주자학적 교육관에 대해서 시시비비적 태도를 견지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성실하게 제시하는 다산의 태도는 현대적 자본주의 교육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적극적 접근을 고무한다. 이 점에서 다산은 독창적이고 자랑스러운 한국의 교육사상가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다산의 인간 및 교육관은 역사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교육의 개선을 위한 시금석으로 던져주는 함의가 매우 풍부한 것이라 하겠다. 
 
참 고 문 헌 
강만길 등(1986). 정다산과 그 시대. 민음사.강만길 등(1990). 다산학의 탐구. 민음사.공자(1973). 논어. 표문태 옮김. 현암사.권중달(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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